박석근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직후인 1913년 8월 2일에 경북 의성군 비안면 동부동에서 마을의 유지 박홍석 씨와 서옥연 씨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라면서 아버지를 닮아 키가 크고 몸이 호리호리한 유교가 선호하는 군자(君子)형으로 온 가문이 좋아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경상북도는 신라의 불교 본산지인 경주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불교의 영향이 막강하여 우리나라 8도 중 불교 사찰이 가장 많은 곳이다.

그러나 불교국가 고려의 멸망으로 조선은 유교의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안동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당시 경상도 주민들은 거의 불교가 아니면 유교의 신봉자들로 가문을 이어갔다. 그의 집안도 유교와 유학의 전통을 잇는 가문으로 유명해서 해마다 조상들의 제사를 몇 번이나 치루느라 가세가 많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이를 안타깝게 여겼으나 어쩔 수 없었다. 석근이가 동네 아이들과 함께 서당에서 점점 어려워지는 한문공부를 하던 12살 나던 1924년 9월 어느 날이었다.

동네에 난데없이 북소리가 둥둥 울리면서 누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예수님 믿고 구원 받읍시다!”

이 소리에 그는 아이들과 함께 구경삼아 달려갔다.

“우리는 이웃 마을 군위읍에 있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우리도 본래 유교의 가문에서 자랐으나 달마다 드리는 조상제사에 복은커녕 점점 가난해져 하루 두끼 밥도 먹기 어려웠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보니, 복은 조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깨닫고, 지금은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믿고 복을 받읍시다.”

이렇게 군위교회에서 온 전도대원 7~8명이 사흘 동안 날마다 이곳에 와서 북을 쳐서 사람들이 모이면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잘 살아보자”고 외치고 외쳤다.

알고 보니 그 동네 어느 분이 군위에 갔다가 전도 받아 교회에 가서 말씀 듣고 예수 믿은 후, 함께 전도를 온 것이다.

석근이는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아 아이들과 3일 동안 계속 찾아가 말씀을 듣던 중 마음이 예수께 기울어졌다. 그래서 손을 들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고, 친구들에게도 자꾸 권해 여러 명이 손을 들었다.

3일 동안 전도집회로 어린이 수십 명, 어른 여자 몇 명이 믿었다. 그때부터 주일 오후가 되면 군위에서 사람들이 와서 동네 박갑연 씨 집에서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듬해 군위교회가 신관빈 여전도사를 파송해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는데 전도사님의 계속 전도로 차츰 남자 어른들도 감화되어 믿어, 2년 후 24평 교회도 지었다.

이 때 그의 부친도 믿어 온 가족이 기독교 가정이 되어, 몇 년 후엔 그의 부친이 첫 장로가 되었다.

석근이는 늦게 생긴 동네 소학교를 졸업한 후, 큰 뜻을 품고 아버지의 허락으로 대구로 가서 5년제 공업중학교에 1928년에 입학하여 하숙을 하며 공부하였다. 그는 농사로는 돈을 벌수 없고 기술이 있어야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는 성격이 반듯하고 적극적이며 배움에도 열심이어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러자 대구에서 가장 큰 직조공장에서 공업학교 우수한 졸업생 몇 명을 스카우트 했는데 그 중에 뽑혀 입사했다. 그래서 새로운 직조기술을 배워가며 일해서 생활도 안정 되어 결혼도 했다.

그는 대구에서 학교에 다닐 때 집에서 가까운 공평동교회를 찾아갔는데, 다행히 고향교회와 같은 성결교회여서 열심히 다녔다. 고향의 주일학교에서 배운 것을 근거로 곧 은혜 받아 회개하고 세례 받았다.

또 중생을 체험하니 하늘 백성의 확신으로 더욱 은혜를 사모했고, 집사가 되자 주일학교 교사를 자원해서 열심히 가르쳤다. 또 부흥회를 통해 십일조를 하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주신다는 말씀에 월급에서 십일조를 가장 먼저 실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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