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애굽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객으로 시작했던 히브리인들은 약 4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매우 번성하고 강하게 되었고, 결국 애굽 땅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히브리인의 조상에게 주신 언약의 성취였습니다만, 그 땅의 주인이었던 애굽 사람에게는 새로운 위협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혹시라도 히브리인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떻게 하나’ 라는 조바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새 왕은 히브리인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방법이란 그들을 건축공사에 강제로 동원하여 그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더 번성(히.이프로츠 출 1:12)했습니다. 여기에서 ‘번성하였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이프로츠’라고 하는 용어는 본래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리듯이 많은 열매가 맺혀진다고 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즉 성경은 바로가 히브리인들을 학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포도 열매들이 탐스럽게 열린 것처럼 점점 더 강하여지고 숫적으로도 많아져서 애굽 스스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히브리인 인종 말살 정책을 펴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히브리 산파를 불러 명령하기를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어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고 말합니다. 여성을 가사 일에 부려먹고, 성적인 착취의 대상으로 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정책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계획을 비웃기라도 하듯 ‘별 볼일 없음’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을 상징하는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여인들을 통해서 오히려 출애굽의 서막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조력자들은 항상 ‘별 볼일 없음’과 ‘하나님을 경외’를 떠올리게 하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성경에서 보듯이 요셉이 그랬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할 때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아리마대 요셉과 마리아가 그러했고, 동방박사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주목받지 못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이들이었습니다. 건축자들은 항상 돌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쓸모 없는 돌과 쓸모 있는 돌을 구별할 줄 아는 안목이 탁월합니다.

만일 건축자에 의해 쓸모없는 돌이라고 여겨진다면 사실 그 돌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주목받지 못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을 참 자연스럽게 행하십니다.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교만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만, 내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것만큼 주님을 슬프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스스로 연약하다고 여기며 절대로 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불신앙 중의 불신앙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주님의 마음으로 나를 온전히 바라 볼 줄 아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포도나무 가지는 오직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열매를 맺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법을 훈련하십시오. 지금 보다도 더 주님 품을 파고 드는 법을 익히십시오.

내가 한없이 무력하다고 느껴질 때 그 분의 강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는 능력의 하나님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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