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싫은 사람과는 언제 헤어졌어도 너무 늦은 거다. 좋은 사람과는 언제 만났어도 너무 늦은 거다. 헤어지는 사람은 미움 때문에, 함께 있는 사람은 사랑 때문에 너무 늦은 거다. 그만큼 그가 님을 사랑했던 거다.”(김남준,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백이십 번쯤 독파한 어느 신학대학 교수가 “내가 늦게야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나이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에 꽂혀서 읊은 사랑노래이다.

▨… “나에게 가장 낯선 사람은 나 자신이다”라고 밝히는 이 신학대학 교수는 “사라질 것을 사랑함이 고통”이라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미학까지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깨달음을 빌려 밝혀 준다. “내가 늦게야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나이다. 이처럼 오래된 그러나 또한 이처럼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이제야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나이다.(아우구스티누스,『고백록』 한글역정리:김남준)

▨…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 세상을 향한 그분의 사랑 때문(요3:16~17)이었다. 성서의 이 증언에서 우리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독생자 예수의 사랑을, 사라질 것을 사랑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하나님의 비우심(Humility of God)으로 받아들인다. 신앙은 이 자신을 비우시는 절대자 앞에서 우리도 자신을 비우는 자로 살 것을 결단하고 그 결단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 11월 11일이 무슨 날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빼빼로 데이’라고 대답한다. 어떤 이들은 ‘농업인의 날’로 지정되어진 것을 기억하고 ‘가래떡 데이’라고 답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를 한 번이라도 지하철에서 겪어 본 사람들은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고 11월 11일은 ‘지체장애인의 날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기억해낼 것이다. 그럼에도 기억은 기억으로만 그쳐버린다. 이 사실을 어느 그리스도인이 있어 부정할 수 있을까.

▨… 지체장애인의 이동할 권리 보장을 거부할 시민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늦게라도 그 분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면 묻기조차 낯뜨거울지 모른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전장연의 시위를 마뜩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그 많은 시민, 사회단체도 또 한국교회도 그분을 향한 사랑은 잊은 듯하다. 사라질 것을 사랑하는 고통이 두려운 것일까. 아니,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모든 것이 허용되는 신(하나님)없는 세상의 혼돈’이 시작된 것일까. 답을 듣기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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