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고 애통하고 또 애통하다. 이태원 핼러윈 파티 도중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주일을 앞두고 느닷없이 날아든 이 비보에 온 국민이 깊은 충격과 슬픔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더욱이 피해자 대부분이 10대와 20대의, 그야말로 창창하고 꽃같은 청춘들이지 않은가!

너무나 갑작스럽고 황망하고 허무한 사건이었다. 좁은 장소에 몰려든 수많은 인파들이 밀고 밀리다가 한순간에 그러한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이 참사로 안타깝게 희생당한 수많은 영혼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유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또한 이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모든 이들이 함께 대책을 마련하고 노력하길 바란다.

기독교계는 이 비극 앞에 그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함께 애통해야 한다.

이번 참사와 같이 엄청난 비극으로 인해 피해 당사자들과 온 국민이 애통해 하고 있는 이러한 때일수록,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좋은 뜻으로 한 말이라 해도 신중하지 못하면 상대방에게 와전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소통의 시대, 올바른 공감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이 시대 이 사회와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과 같은 일들로 논란을 빚는 것을 볼 때마다, 교계 지도자들의 공감 능력에 대해 우려하게 될 수밖에 없다.

바르게 공감하려면 이 사회를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르게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듯, 낮아지고 또 낮아져서 시대와 사람과 함께하며 사랑해야 한다.

이런저런 발언들로 논란이 이는 것은 공감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닌지,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것은 겸손과 사랑의 부족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어떤 이들은 이 사건을 정치 선동의 도구로 이용하기도 하며, 또 이 사건을 놓고 악의적 글을 쓰는 인면수심의 행위를 하기도 한다.

모두가 피해자 위로 및 대책 마련과 재발 방지를 위해 한 마음이 되어도 부족한 상황에서, 이런저런 불필요한 잡음으로 힘을 낭비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안전해졌나. 남을 비방하는 데만 열을 올리다가 정작 자신의 일상 속 작은 부분들에서 안전불감증에 빠진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그러나 어두운 단면만을 보며 절망하고 비방하고 회의주의에 빠져선 안 된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다른 이들의 목숨을 살린 의인들, 최선 그 이상의 노력을 다했던 구조대원들 및 의료진들, 그리고 음으로 양으로 피해자들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고 기도한 수많은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붙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도,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갖가지 잘못과 나약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그러한 죄악과 증오와 어둠의 세력에 함몰되지 않고, 십자가 너머에 있던 부활의 희망을 발견하고 붙들고 믿은 이들에 의해 역사는 바뀌었다.

이제 이 비극 앞에, 한국교회는 희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아파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도움과 나눔의 손길을 뻗고, 기도의 무릎으로써 말이다.

우리의 작은 힘과 능력으로는 부족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결국 이 암담한 현실 속에 또다른 희망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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