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원 참사 뉴스를 일요일 아침에 외신에서 먼저 보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믿어지지 않았다. 이십 대의 아들딸을 둔 지인들이 생각나 혹시? 하는 마음에 안부를 묻는 문자를 보냈다. “딸 이태원 안 갔지?” “자고 있는 애가 그리 고마울 수 없더라.” …페이스북에 이번 사고에 대해 뭐라고 글을 올리려다 그만 두었다. 어떤 말로 그 슬품을 위로하리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최영미‧시인, 조선일보 제31650호)

▨… 어느 원로연극인(손숙‧배우)도 특별기고를 통해 호소했다. “우리 이웃과 사회에 요청합니다. 자식 잃은 부모의 손을 잡아주세요. 묵묵히 바라봐주고 들어주세요. 그들이 울면 같이 울어주세요. 참척의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만나 보니 그나마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였습니다. …더이상 고통이 없기를 바랍니다. 종교가 있든 없든,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조선일보 제31650호)

▨… “나는 텐프로였다”로 이름을 알린 작가 소재원은 엄청난 비극의 본질을 외면하고 “그러게 왜 (사람 많은) 저길 가?”라고 비아냥대는 일부 누리꾼들에게 “젊음을 즐기는 것이 잘못된 건가?”를 물었다.(인스타그램) 그리고는 그 질문의 무지막지함과는 사뭇 다른 어조로 크리스천의 신앙고백 같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느 시대나 존재해온 빌어먹을 것들을 비판하고 안타까운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슬픔을 나눠주길 바란다”고.

▨…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문장에서 기독교적 회개의 어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 글을 쓴 시인이 혹시 그리스도인일까를 질문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기도할 때’라는 원로배우나 “기도하고 함께 슬픔을 나눠주길”이라고 기도라는 어휘를 직접 사용한 작가에게서 신앙인의 향기를 맡을 수는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는” 꼴일까.

▨… 신앙은 어느 교회 소속이라는 문서로 증빙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삶의 자리(문화)를 변혁시킨다”(H.R. 니버, 『그리스도와 문화』)는 믿음을 우리는 따른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믿음은 증빙서류로는 증명되어진다. 그러나 문화의 변혁이라는 차원에서는 교회와 교인 수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핼러윈 축제 압사사고라면 지나치게 기우는 판단일까. “종교는 문화의 내용”(P. 틸리히 『문화신학』)임을 모를 리 없을텐데 신앙이 삶의 자리를 전혀 변혁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뉘라서 부정할 수 있는가. 스러진 젊은 생명들이 아까워 부르는 선소리를 뉘 있어 들어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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