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아크 인생

세월이 갈수록 조금씩 조금씩 선명해 지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주님의 은혜요, 앞으로도 그 분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 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나를 자녀 삼아주신 것은 물론이요 우리가 영원히 거해야 할 처소를 예비하여 주셨다는 사실도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나에게 베푸셨다는 사실이 감사입니다. 

천사들이 롯이 살던 도시를 방문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성의 악함을 보시고 천사들은 그 성을 멸망시키기로 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있었고, 또한 천사들을 향한 롯의 후대함이 있었던 터라 천사들은 롯과 그의 가정을 살리기로 결심하고 그에게 성 밖으로 나갈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이에 롯은 그 딸들과 사위들에게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망시키리니 일어나 그들이 머물고 있는 성을 떠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창 19:14)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다가 문득 이 말씀이 원어로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롯의 사위들이 그 성이 멸망한다고 하는 롯의 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였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롯의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다”(창 19:14)는 말은 ‘짜아크’란 말을 번역한 말이었습니다. ‘짜아크’란 말을 우리는 이미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일이 있기 전 그 천사가 아브라함의 장막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하자 사라가 그 뒤 장막 뒤에서 듣고는 그저 웃었는데 이 때 사용한 용어가 ‘짜아크’입니다.

롯의 딸들의 사위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고 웃었던 것처럼, 사라도 역시 동일한 행동을 보였던 것입니다. 속으로 웃었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롯의 사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부류의 사람이 천사의 말에 웃은(히. 짜아크) 결과는 천양지차였습니다. 

한 사람은 예언의 말씀대로 약속의 아들을 얻었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소돔과 함께 멸망하고야 말았습니다. 말씀 앞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의 모습과 태도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롬 1:29~31)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모르고 지내고 무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도하다보면 문득 문득 내 안에 그런 악한 것들이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심판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오직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심판을 받고 정죄 받는 이들이 우리보다 더 큰 죄악을 행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저들과 동일한 모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고 계시다는 사실이 은혜입니다. 

우리도 롯의 사위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짜아크’하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하나님을 향해 그리고 그 분의 말씀 앞에 ‘짜아크’하며 살아갈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또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도 그 분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 분의 긍휼하심을 기다립니다. 혹시 부지중에라도 하나님을 ‘짜아크’ 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그저 긍휼히 여겨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는 은혜로 덮어 주실 것을 기대하며 오직 그 분만을 바라봅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