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사역하던 강호빈 목사님이 교통사고로 소천 하였다는 비보를 접하였다. 나는 그분을 직접 중국에서 여러 차례 만났고 용정지역 인근에 교회를 개척하여 세우고 헌당하기까지 협력하였던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온화한 성품을 가지고 계셨던 목사님은 매사를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진행하였다. 당신의 사역지가 사회주의 국가이고 북한과 가까워서 모든 일에 조심하며 신중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선족을 돕고 신앙으로 키우며 때론 탈북자들을 돕는 일에 힘썼다.

그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이 중국 선교에 관심을 두었다. 국교가 열리고 교류가 시작된 후 조선족들이 일본제국주의 시대부터 이주하여 한을 품고 살아가는 용정(북간도)지역을 무심히 넘길 수 없었다. 선교 명목으로 투자하고 경쟁적으로 지원하는 모습은 옥석을 가리기에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근 20년 우리교단 안의 장로 선교친목회 멤버이다. 그 선교회를 통하여 멕시코, 브라질, 필리핀 등에 교회를 세워 개척하였는데 중국에도 교회를 세우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우리 일행은 연변까지 날아갔다. 현지 선교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 강호빈 목사의 안내를 받으며 심도 있는 검토를 거처 용정 인근 도시 화룡에 교회를 세우는 계획을 마련하였다.

나는 수년 전에 우연한 선교의 일로 그곳에 갔다가 실망만을 안고 돌아온 기억이 있었다. 그분은 그런 오해의 소지를 말끔히 씻어주며 흔쾌하게 교회개척을 추진하도록 협력하여 주었다. 우리는 5000여만 원이 넘는 재정을 투입하여 교회와 사택, 그리고 앞으로의 발전을 예상한 부지까지 마련하여 주었다.

2009년 8월 교회가 창립되고 우리성결선교 친목회원들은 강호빈 선교사와 함께 민족의 한을 푼 것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께 교회를 헌당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매월 선교비 30만 원씩을 지금까지 송금하고 있었다.
금년 봄 3월에 우리 선교회 총회가 유성에서 있었다. 우리는 강호빈 목사님이 독침 테러를 당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있었다. 마침 귀국 중이신 강 목사님에게 우리 총회에 오셔서 사역보고를 겸한 사건 보고를 요청하였다.

총회에 오신 목사님은 작년(2011년) 여름에 있었던 독침 테러사건을 상세하게 간증하시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독침 피습을 당하고 몇 날을 혼수상태에서 헤매다가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 그 사건으로 연변지역 선교가 어렵게 되었다고 하셨고 사역 지역을 다른 곳으로 바꾸기를 원하였다. 우리는 조심하시기를 간절히 당부하고 함께 기도하였다.

강호빈 선교사의 교통사고로 인한 소천소식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그 의심나는 사실이 중국 연변지역의 선교를 포기하며 따질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강 목사님의 사모님이 지혜롭게 포기하시고 고인을 화장하여 고국으로 모셔왔다. 우리교회 담임목사님이 해외선교위원회 위원장이어서 고인의 빈소를 우리 교회에 차려드렸다. 그로서 나에게는 고인에게 향한 조금의 위로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 집에는 두 점의 고인 유품이 있다. 하나는 시편 39편 7절을 중국어로  손수 써서 만든 족자와 예술적으로 만든 수제품 나무 십자가이다. 긴 족자는 거실 벽에, 십자가는 나의 책상 머리위에 걸려있다. 그것이 순교자 강호빈 선교사의 유품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 강호빈 목사님은 교단 순교자 이판일 장로님의 손녀 사위였으니 대를 이어 순교한 거룩한 가계를 이었다고 믿고 싶다. 작년 여름, 독침을 맞는 순간 순교당한 셈이었다. 새로 중국 다른 곳에서 사역을 진행하고자 하면서 다시 사역을 못하게 된 연변 사역을 정리하려고 들어가셨다가 순교한 것이다. 

주님의 부활 승천하신 이후 스데반이 순교당한 첫 희생자였다. 그 이후 고귀한 순교자들을 우리는 말로 또는 듣기로만 알뿐이었다. 외국에 교회를 세우고 함께 협력하며 그리스도의 정과 사랑을 나누던 이가 순교하였다면, 그분과 잠시나마 같이하였던 나는 무슨 명목으로 살아있는 자의 삶의 의미와 명분을 이어가야 하나? 고인의 귀천을 삼가 축복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