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실험에서 과학자들이 여러 마리 쥐의 뇌에 전극을 연결해, 그 쥐들이 페달을 누르기만 해도 흥분이 일어날 수 있게 했다. 맛있는 음식이냐 페달이냐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을 때, 쥐들은 페달을 선택했다(저녁 먹으러 가기 보다 비디오게임이 더 좋은 아이들처럼). 쥐들은 배고픔과 탈진으로 쓰러질 때까지 계속 페달을 눌렀다”(유발 하라리, 호모데우스)

▨… 코로나 팬데믹이 이땅의 교회들을 송두리째 삼키기 전에는 주일예배에 100명 가까운 신도들이 모이던 어느 교회의 목회자가 남이 들을새라 작은 목소리로 하소연 했다. “마스크는 써도 그것 외에는 예배에서 달라진 것이 없는데 예배 참석인원이 도무지 온전하게 회복되지를 않습니다.” 전화를 곁들인 심방도 부지런히 하고, 목회프로그램도 새롭게 준비하고, 무릎을 꿇어 기도하는 열심에도 불을 붙이고 있음에도 예배인원은 팬데믹 상황 이전의 60~70퍼센트 수준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 왜일까? 무슨 연유에서일까? 코로나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는 동안 교회나 기독교단체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행태들을 마구 드러내 보여준 사실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반기독교 편에 서 있기를 자랑하는 리처드 도킨스나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진영에 승리를 선언하는 천인공노할 어떤 역사적 사건이 이땅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뤄지기라도 했다는 것일까?

▨… 아닐 것이다. 절대로 아닐 것이다. 우리는 뇌 자극에서 얻는 즐거움을 위해 지쳐 쓰러질 때까지 페달을 누르는 쥐가 아니다. 우리는 갈보리 산정의 십자가 사건의 진실과 사랑을 체험으로 알기에 교회가 어느 시대에도 그 사건의 진실과 사랑을 증언해야 한다는 결의에 서 있도록 페달을 눌러 왔다. 교회는 교회가 존립했던 그 모든 시대에서 세계를 향해 또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밝혀왔다. 그것은 부활의 주님께서 수치와 모욕의 십자가를 속죄와 사랑의 십자가가 되게 하셨기 때문 아니겠는가.

▨… 팬데믹 이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몸부림하는 정성을 쏟아도 예배인원은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는 현실에 많은 목회자들은 좌절한다. 절망한다. 그럴수록 저들은 마음을 다잡는다. “우리에게는 예배를 드리지 않을 자유가 없다”고 선언하며, 이 선언은 정부가 대면예배를 금지했을 때, 어느 지방회 단톡방을 휘어잡았던 눈물이다. 그렇다. 우리 성결인들은 십자가의 사랑을 증언하기 위해 예배의 자리를 지킬 것이다. 예배인원에 결단코 연연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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