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에 계시는 참된 하나님이시여, 오늘도 새로운 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어떤 사람에게서 전화가 올지, 누가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서로 알게 될 것을 생각하니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써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다하라 요네코는 고교생 때 신주쿠 철로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두 다리와 왼쪽 손을 잃고 오른 손도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 미우라 아야코(『고독에도 손길이』)에 의하면 두 딸의 어머니인 다하라 요네코의 지금의 모습은 세상의 그 어떤 여인보다 밝은 얼굴이다. 24년 전의 ‘자살 실패’로 요네코는 두 다리와 팔 하나, 손가락 두 개를 잃었지만 신학도였던 남편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병실을 찾아온 신학도는 삶의 소망을 다시 찾게끔 그녀의 가슴에 사랑을 싹 틔워 주었고 참소망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예수께로 가는 길의 안내자가 되었던 것이다.

▨… 러시아 군대가 베를린까지 진격했을 때 독일여인 베르히마이어는 자신의 세 아이를 위해 식량을 구하다가 러시아 수색대원에게 붙들렸다.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되어 우크라이나까지 끌려갔다. 그 수용소에서는 죽을 병에 걸리거나 만삭의 임신부 외에는 석방이 불가능했다. 베르히마이어는 절망을 곱씹다가 자신을 임신시켜 주도록 보초에게 애원했다. 마침내 만삭의 몸이 된 그녀는 베를린의 집으로 돌아왔다.

▨… 아기가 태어나자 그녀의 남편이나 아이들은 한 마음으로 산모와 아기를 아꼈다. 아기의 명명식에 모인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 아기가 그집 가족이 맞는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았다. 그 아이 디트리히는 그 가족의 당당한 넷째 아들이었다.( J. 플래처 『상황윤리』) 그러나 훗날 세계 최대의 교회가 있다는 어느 곳에서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베르히마이어의 행동이 기독교윤리에 적합한가를 놓고 “감 놓아라, 배 놓아라”를 읊은 적이 있었다.

▨…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고백했었다. 복음이 자신의 삶의 이유이고 목적이라는 표현 아니겠는가. 복음은 일본이라는 문화에 갇혀있는 요네코를 변하게 하고 베르히마이어에게는 전통적인 도덕관념을 뛰어넘게 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변화까지도 일으킨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채라면 아무리 성령임재를 외치는 간절한 우리의 기도라 할지라도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신앙은 우선 삶의 자리에서 증언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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