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좋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교회에 더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도, 잃어버린 이름을 불러주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누구의 아내로 그리고 누구의 엄마로 이름 없이 살다가 자신의 이름이 불려질 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게 된다.

한국교회에서 규모가 작은 교회를 부르는 호칭이 꽤 많다. 그리 불러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다. 그런데 ‘개척교회’, ‘작은 교회’, ‘미자립교회’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어느 교단에서는 ‘비전교회’라고 좀 더 배려하는 세련된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름은 정체성의 표현이다. 어떤 집사님의 이런 질문 가운데 고민이 시작됐다. “목사님, 저희도 작은 교회를 돕는다고 작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에 크고 작은 교회가 어디 있을까요? 마땅한 이름은 없을지요?”

바람직한 고민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고민이 내 고민이 되어 찾아왔다. 주님께 물어볼 수밖에 없다. “주님, 어떤 이름이 좋을지요?, 알려주세요.” 여러 생각들 속에 주신 이름이 바로 ‘겨자씨교회’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겨자씨의 의미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첫째로, 겨자씨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마 13:31)

둘째로, 겨자씨는 믿음을 상징한다. 믿음은 무한한 하나님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셋째로, 겨자씨는 비전을 보여준다. 지금은 현실적으로 작아 보이지만, 미래는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되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 13:19)

간혹 사람들은 말한다.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또 교회를 개척해야 하나요?” 맞는 말이다. 지금은 부흥의 때도 아닌데, 사서 고생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개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몰라서 하는 게 아니다. 이유 없이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불나방이 아니다.

개척을 하며 20여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니, 하나님의 뜻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사명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 돌이켜 보면, 그런 교회가 아니면 올 수 없는 영혼들이 있다. 영혼의 가치는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순전히 우리의 문제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세상적인 기준에 길들여져 있다. 그리고 그 잣대를 무자비하게 교회에다 갖다댄다. 그리고 비난을 퍼붓는다. 겨자씨교회 목회자들이 정작 힘든 건, 세상 사람들보다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그런 눈초리이다. 지금 회개해야 한다.

‘겨자’의 꽃말은 ‘무관심’이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도 한다. 한국 사회도 복지 사각지대에 빠진 이웃의 비참함에 가끔씩 화들짝 놀라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제거하려고 엄청난 투자와 대책을 쏟아내곤 한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교회들은 어떤가? 개교회주의로 역행하고 있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내 코가 석 자’이니 그리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했다. 그러나 도움은 돈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

겨자씨교회에 겨자(무관심)로 대해선 안 된다. 주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인 공교회성을 회복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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