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2번 죄수가 되어

1943년 5월 늦은 봄, 아침 햇살을 받으며 유치장 생활 12개월 만에 동경 구치소로 이송되었다.

쇠고랑을 찬 채 형사의 경계를 받으며 다가다(高田) 전철 정류장에서 승차했다. 정류장 서편 2분간 거리에 그가 섬기는 교회당과 그의 집이 있다. 숲사이로 슬금슬금 교회와 집을 바라보면서 걸어가는 그의 마음은 착잡하고 감개무량했다.

1년 만에 보이는 교회당 지붕으로 계속 눈이 쏠린다. 이미 교회는 해산되고 신도는 뿔뿔이 흩어져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이국에서 당하는 민족적인 공허감과 양 떼를 잃은 목자의 복받치는 설움이 뒤엉킨다. 

형사들이 서두르는 대로 전차에 몸을 싣고 넷째 정류장 소가모(巢鴨)에서 내리는 동안 1년 만에 바깥공기와 늦봄 햇빛의 감각에 눈물이 어른거린다.

‘아, 내가 약한 인간이구나!’ 하고 자인하면서 허둥지둥 구치소에 도착했다. 입소 절차를 마치고 미결수가 입는 푸른 죄수복을 입으니 옷섶에 1072이란 번호가 붙어 있었다. 

그의 이름 대신 1072호로 호칭 되는 영어(囹圄)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간수가 데려다주는 대로 자그마한 철문으로 들어가니 변기와 동거하는 독방 제3사(舍) 36호실이다. 이 36호실은 역사가 바뀌어 일본이 패전하여 전범자가 되어 처형된 전 일본 수상 도오죠 히데끼(東條英機)가 수감 되었던 독방이다. 구치소 생활이 어느덧 해가 두 번이나 바뀌었다. 

그는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한 나약한 인간의 실존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첫째는 음식물에 대한 실패다. 한 죄수가 취조받고 오더니 그에게 사탕 한 개를 주었다. 이것을 입에 넣으니 몇 달 만에 맛보는 단맛이다. 그는 이 사람에게 보답할 마음이 있었다.

어느 날 식사 차입을 받으러 나갈 때 과자 몇 개를 호주머니에 넣고 감방에 들어갔다. 이런 일은 금지된 사항이다. 그 사람에게 몇 개를 주고 호주머니에 한 두 개 남아 있는 것이 발각되어 벌을 호되게 받았다. 

이때 감옥의 식사는 콩밥인데도 비교적 분량이 많고 좀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옥중에서 식욕은 부끄러울 만큼 추해진다.

다다미 사이에 떨어진 밥알이 발에 밟혀 새까맣게 된 것이라도 눈에 띄면 슬쩍 씻어 입에다 넣는다. 그리고 또 있는지 살피는 판국이다. 구치소에는 5등 밥이고 감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4등 밥이다. 등수가 좀 높은 4등 밥이 약 반 숟가락 정도 많다.

감방 안에서 하는 일은 짐 부칠 때 사용하는 꼬리표에 철사를 꿰는 것이다. 그는 4등 밥이 탐나서 감방에서 일하기를 지원했다. 그런데 그는 평소 식사를 1일 2식을 하는 습관이 있다. 감옥에서도 1일 2식 주의를 지키느라고 노력했었다. 1일 2식을 하면서도 4등 밥 욕심을 부린 것이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동상으로 손발이 부어 일할 수 없게 되어 또다시 5등 밥으로 떨어졌다. 육을 가진 인생이란 이렇듯 약한 것임을 절감했다.

예수께서 40일 금식 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시험을 물리치신 성경 말씀을 묵상했다. 배고파도 음식물에 집착을 버리고 성경으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을 했다.

하루는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철창에 앉는다. 그는 그 파리를 잡아서 날개를 떼고 방바닥에 놔뒀다. 다른 데로 날아가지 말고 내 방에서 내 동무가 되라는 뜻이었다. 감옥 독방생활은 이만큼 외롭고 쓸쓸했다. 

둘째는 침착하지 못한 실패다. 하루는 용수를 쓰고 간수들의 총검 아래 10분간 운동하는 시간이 왔다. 용수 틈으로 슬쩍 보니 고바라(小原十三司) 목사가 눈에 뜨인다. 너무나 반가워 “고바라 선생”하고 불렀다. 그러자 간수는 그에게 운동을 중지시키고 벌을 호되게 줬다. 아마 고바라 목사도 톡톡히 당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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