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도의 방법으로써 성결한 사랑

성결의 적극적인 표현은 온전한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지나며 교회의 성장이 둔화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복음 전도가 더욱 힘들고 어렵게 되었다.

팬데믹 시기에 공적 신앙의 부족한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에도 그러하지만,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에 대한 기피 현상이 생겨난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성결교회는 어떻게 영적인 자산을 기반으로 이 시대에 맞는 효율적인 전도를 실천할 수 있을까? 질문의 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성결을 경험할 때 효율적인 복음 전도가 가능하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복음 전도를 연구하였던 저명한 전도 학자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초대교회, 특별히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 속에서도 복음 전도의 열정이 불타오를 수 있었던 동기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언급한다(마이클 그린, 『초대교회의 전도』 144-45). 스코트 존스(Scott J. Jones) 역시, 사랑을 통한 복음 전도의 방법을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지만,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한다(Scott J. Jones, 『The Evangelistic Love of God & Neighbor』, 166-67)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에 있는 비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때 세상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코로나 시대를 거치며 기독교가 보여준 어설픈 민낯 때문에 사회가 기독교에 대해서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이지만 이 시대는 오히려 사랑과 관심, 돌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코로나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신앙의 본질인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실천할 수 있다면 코로나는 한국교회에 큰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성결은 어떤 관계이며, 성결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중생이란 죄와 죄의 결과인 사망으로부터 해결함은 받지만, 아직 그 근원적인 죄에 대해서 완전한 해결을 받지는 못한 상태를 의미하고, 성결은 모든 죄의 근원까지의 해결을 의미한다.

개념적으로 보자면, 성결은 구원의 완성된다. 이에 구원과 성결을 연결 지어 보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성경적 사랑은 크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를 바탕으로, 중생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분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단계라고 한다면, 성결은 온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하게 이웃을 사랑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즉, 성결의 적극적인 표현은 온전한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전도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체험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웨슬리는 사역자의 유일한 직무가 복음 전도임을 강조하였고, 그 스스로도 매년 3~4천 마일을 이동하며 복음을 전했다.

웨슬리가 이처럼 평생 모든 세상의 연약한 사람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지칠 줄 모르고 이들을 찾아다니고 사랑의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었던 이유와 원동력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며 그 사랑의 모습으로 닮아갔기 때문이다.

둘째 서로 사랑을 가시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초대교회를 살펴보자면 내적으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소속 공동체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고 외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을 환대하고 돌봐주었다.

특히 에디오피아에서 발병한 역병이 251년 시작하여 262년까지 지속되면서 카르타고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는데, 이런 끔찍한 재앙으로 피해를 입었던 많은 사람들을 초대교회 교인들은 기꺼이 환대하고, 돌보아주었다.

셋째 전도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접촉점을 통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연약하고 병들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며 그것을 접촉점으로 삼아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연약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돌보심은 그분만의 독특한 사상은 아니었다. 이미 구약에서 언급된 내용이었다. 구약의 하나님 역시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에게 깊은 사랑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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