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죄를 지었기에

1942년 6월 26일 5시 30분쯤, 낯선 사복형사들이 닥쳐왔다. 영장도 보이지 않고 이름을 확인하더니 경찰서로 가자는 것이다. 전날 수요일 기도회에 20여 명의 신도가 모여서 예배를 인도했었다. 신도들이 헤어지면서 왠지 불안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김 목사 역시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한 채 자고 일어난 이른 아침이다. 옷을 바꿔입을 시간도 없이, 가족들과 작별할 여유조차없이 연행되어 경찰서 특고실(特高室)에 갇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형사 6~7명이 트럭으로 목사 서가에서 서적 천여 권과 설교 노트와 일기장 11책을 압수해 갔다.

미국 군인과 찍은 사진과 성경도 압수해 갔다. 그 당시 교회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신도들의 울음소리는 마을주민들을 놀라게 했다. 일본인들이 쑥덕거리는 광경을 본 그의 가족들은 일본 동경에 더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정오에 끈이라는 끈은 다 풀어 압수당해 바지를 추켜 쥔 채 유치장에 밀어 넣어졌다.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어리둥절하면서 다다미 석 장 정도의 감방으로 들어갔다. 감방에 발을 들여놓자 쾅! 하고 철문 닫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이때부터 감방 생활은 이듬해 5월까지 계속되었다. 

잡혀 온 이유가 무슨 무엇일까? 어젯밤 기도회 설교에 걸리는 말이 있었는가? 혹은 간첩이 교회에 스며들어 거짓 밀고를 했는가? 별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흘째 되는 아침에 간수가 ‘야마사기 교지’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니 귀에 익은 이름인지라 창살 틈으로 내다봤다.

훌리네스 야마사기 목사가 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곧 나갈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 1년간 유치장 생활로 이어질지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야마사기 목사는 다른 유치장으로 이송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갇힌 이유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어찌 그리 한 번도 조사하지 않고 지루한 세월만 보내게 하는지? 

여름이 지나 가을과 겨울을 지나 이듬해 봄을 맞이하니 삭 깎은 머리가 길고 길어 올백이 되었다. 수염은 텁수룩하게 길었다. 몸의 기름기는 쑥 빠져 몸은 왜소해지고 얼굴은 반쪽이 되었다. 대소변을 보러 일어설 때 쓰러지기를 거듭하자 의사가 늑막염으로 진단한다. ‘내게 이 환란에 병고까지 겹치는 까닭이 무엇 때문일까?’ ‘어째서 취조는 시작하지도 않는지…’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유치장의 규칙은 대단히 까다로웠다. 목사이기에 감방 안에서 주의 이름을 더럽힐까 꾸미고 다듬어가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비좁은 유치장 안에는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유치장 안에 갇힌 사람들이 낮에는 이를 잡는 일이 일과이다. 

그럴 수밖에 1년 동안 목욕 한번 못했으니까. 아침이 되면 오늘이나 불러낼까? 오늘이나 잡혀 온 이유를 알까? 이것이 알고 싶은 유일의 희망이었다.

어느덧 가을이 깊어가는 10월이 되었다. 감방 생활 5개월만인 어느 아침에 귀를 의심할 만큼 김광남 목사의 이름을 부른다. 허둥지둥 비틀걸음으로 간수를 따라갔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오늘에서야 불려 나가나, 생각하며 따라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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