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십자가!

‘은혜!’ 라고 하는 용어만큼 기독교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확한 의미를 간과되어 사용되는 경우를 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만이 베푸실 수 있는 주권적 섭리라는 의미를 담습니다. 

어느 날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밤에 은밀히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은밀히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그는 유대교의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는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든 종교적인 문제를 판단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예수님과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예수님이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는 모습이 그들에게 좋게 비춰질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성전에서 매매행위로 이득을 보던 이들과 결탁이 되어 있었기에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습니다.

아마 니고데모가 해야 할 임무 중 하나 역시 예수님의 행위를 판결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니고데모가 다른 이의 시선을 피해 은밀히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렵사리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의 화법은 무안하리만큼 직설적이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헬. 아노센)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고 하신 것입니다. ‘거듭나다’라고 하는 말은 아노센을 번역한 말로서 ‘다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과 견줄 수 있는 용어가 있는데 바로 ‘폴린’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두 용어들의 표면적인 의미는 거의 동일합니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라고 하는 작품은 다시 그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을 그렸으나 모두 가작(假作)입니다. 원작(原作)은 오직 한 곳 루브르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원작 모나리자를 ‘다시’ 그리기 위해서는 오직 한 사람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살아나야 가능할 것입니다. 아무리 ‘다시’ 잘 그린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그린 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아닌 일반인이 모나리자 라고 하는 작품을 그리려고 하는 시도는 ‘폴린’(‘다시’)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작품이며 그 본래의 그림을 그리려면 죽었던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살아나서 ‘다시’ (헬. ‘아노센’) 그리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즉 ‘아노센’(‘다시’)이라고 하는 행위는 오직 한 명 만이 가능합니다.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은 오직 한 분으로 인해 가능한데 우리를 창조하시고 만드신 분, 예수님이 보내실 ‘성령으로’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은혜로 시작하였다가 나도 모르게 내 의를 고집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죄성이 고개를 들 때가 있습니다. 마치 니고데모가 율법을 지켜야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하는 말은 참 깊은 의미를 담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것들이 공로가 되어 ‘구원 받음’에 보탬이 될 줄로 생각을 합니다.

선교를 많이 하고, 혹은 내가 직분자로 살았고, 심지어는 주의 이름으로 기도도 하고 병을 고쳤기에 구원은 이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은혜 더하기 인간의 헌신이 구원이라고 하는 공식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류의 생각에 대해서 마태복음 7장 22절에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다고 해도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기까지 했습니다.

오직 주님입니다.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 분을 향하여 통렬한 심정으로 회개하고 오직 주님 안에 거하려고 하는 영적 몸부림이 없는 일회성의 종교적인 일상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히 6:4~6). 오직 그리스도! 오직 십자가! 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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