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이 배척받은 이유

어느 날 블레셋을 크게 도륙한 삼손이 유다 땅 에담 바위에 머무른 적이 있을 때의 일입니다. 복수심에 불탄 블레셋 사람들이 그곳까지 몰려와서 진을 치고 삼손을 넘겨 달라고 위협을 하자 유다 사람들 3,000명이 삼손에게 몰려가서는 그를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겨줍니다. 

그런데 우리를 궁금하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유다의 남자들 3,000명 정도가 모였다면 굳이 삼손을 넘기지 말고 그와 힘을 합쳐 블레셋을 상대로 한 번 자웅을 겨뤄볼만도 했을텐데 왜 그들은 굳이 삼손을 블레셋에게 넘겼을까요?

유다 민족들이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긴 후 삼손 혼자서도 블레셋을 거뜬히 상대한 것을 보면 유다 민족은 삼손을 그들에게 넘기지 않고 블레셋을 물리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긴 것은 단지 그들이 비겁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포도주를 금하고,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아야 하는 규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이 규율을 모두 어겼습니다. 첫째 규율은 물론이요, 둘째 규율도 어겼습니다. 죽은 사자에게서 꿀을 취하는가 하면 블레셋 사람을 죽일 때 나귀의 ‘새 턱뼈’(15:15)를 사용한 것을 보면 그는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규율에 대해서도 그리 개의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이 나실인이라는 신분에 대한 의식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살았습니다.

삼손이 한 번은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히. 티끄짜라 라프쇼 라무트 삿 16:16)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자면 “그의 영혼이 짧아져서 죽게 되었다”하는 말로서, 그가 깊은 고뇌에 빠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 민족이 처한 상황이나 혹은 나라를 위한 근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고작해야 들릴라라고 하는 여인이 끊임없이 그에게 그가 가진 힘의 비결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졸라댔기 때문입니다.

결국 삼손은 이 여인의 꼬임에 넘어가 나실인으로써 지켜야 할 3가지 규율을 모두 범하고야 말았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이 깨진 후 그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창녀를 의미하는 ‘기생’(히. 조나 16:1)과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고, 또 ‘들릴라’라고 하는 여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들릴라’(히. 드릴라 16:4)라고 하는 여인 역시 그 이름의 의미로 유추해 볼 때 그 여인은 ‘행실이 바르지 여인’이었습니다. 즉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전혀 그 이름에 걸맞게 살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삼손이 블레셋 사람과 싸운 이유는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한 문제의식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개인적인 원한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족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삼손에 대한 배신감이 들었던 것이지요. 이는 유다민족이 그를 블레셋에게 넘겨준 이유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평생 바쳐진 나실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얻고 구원 받은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오직 그분께 돌려져야 합니다. 삶의 전부란 내가 가진 욕심과 계획 그리고 꿈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내 자신까지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대해서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실재가 되어지는 그 날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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