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1. 어느 조직이나 그 무대는 타블로다. 매우 늦은 신대원 입학 후, 심한 뇌경색이셨던 부친에게 장애인증(뇌병변1급)이 발급되었다. 3년 후 하늘에서 부르셨다. 주님은 이제야 시간(時間)으로 흐르는 세월(歲月)로 가르치신다. 회환의 눈물이 기도가 된다. 

나는 ‘장애인과 그 가족’이었다. 장모님이 17년 동안 돌보던 업동이, 뇌병변1급 중증장애인을 장모님 소천(所天) 후, 우리부부가 보호자가 되었다. 지금 30세다. 그런데도 ‘장애인과 그 가족이다’라고 인정하는데 긴 시간이 지나간다. 

내 사역을 스스로 ‘타당성 조사’를 했다. ‘세상의 때’가 너무 많다. 배우고 경험한 얄팍한 지식들을 주님의 일에 동원한다. 타블로 무대는 기울어져갔다. 

2. 농담(弄談)처럼 시작된 만남의 커튼이 젖혀졌다. 밀란 쿤데라라는 체코 작가의 ‘농담(弄談)’이라는 책에 작가의 덕목은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커튼을 젖혀주는 역할’이라 했다.

‘장애(障碍)인’,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 나라로 추방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갈 곳이 없는 그들을 반기고 환영하는 그 나라는 있을까?

2000년 그날 이후 자립(독립)생활운동을 하는 장애인들과 예배를 드린다. ‘장애인’만을 생각하는 열정적인 나이어린 목사를 알게 된다.

장애인을 너무도 사랑하였다. 함께 교단의 장애인 사역단체에 가입하여 함께 하자고 하였고 2009년 인천베데스다가 설립된다. 

3. 활동보조인제도의 시행을 위해 중증장애인들과 같이 그들이 시위하는 곳에 가서 참여하였다. 활동보조지원자들에게 ‘장애인자립생활’에 대하여 강의를 맡기도 하고, 자료를 들고 정부부서에 가서 따지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제도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일부일까? 또 다른 ‘장애인과 그 가족’을 보면서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였다. 

인지능력있는 장애인들은 장애인시설폐쇄등을 주장하고 시위등의 방법으로 요구를 하고 또 관철 할 수도 있었지만 발달장애로 인한 자폐 또 지적장애인 그리고 그 가족은 그럴 힘도 시간도 없다. 그들은 24시간 돌봐야 하는 발달장애 가족 때문에 그럴 시간조차 없다. 

그들이 눈에 밟힌다.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을 위한 가장 좋은 사업이 무엇일까 기도하다가 개척한 후 3년째 되던 해 장애인주간보호센터를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목사를 복지사와 합하여 보는 눈(?)들이 생기자 거울을 거의 보지 않던 내가 거울을 보기 시작한다. 아내가 그런다. 당신같이 차가운 사람이 어떻게 장애인 사역을... 내가 거울도 안본다고 생각한 것 같다. 

4. 하나님은 세월 속에서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을 계속 보여주고 계셨다. 말로 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 어느 것이 어려운가를 질문하신다. ‘십자가를 전하려 하기보다 졌던 것’(애오개  1082호)에 방점이 찍혔다. 세월이 『십자가를 전하는 것 ≺ 지는 것』의 부등호를 그려주었다.

5. 양(羊)의 울음소리는 사랑하면 들리고 보인다. 사무엘에게는 들리는 소와 양의 울음소리가 사울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 주님은 들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음을 듣고 그들을 출애굽 시키신다(출 6:5). 

교단에서 234운동을 한다고 하였으나 장애인 사역을 한다고 하여 참여치 못했다. 장애인들의 헌금으로 설립된 새움교회는 장애인 성도가 많았다. 

아내와 234를 시작하였다. 부흥이 된다. 장애인센터의 시설장까지 맡고 있던 것을 차가운 나와는 대비되는 마음이 따뜻한 아내에게 위임한다. 234 부흥운동을 더 열심히 하기로 한다. 2019년 어려운 일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장애인과 성도 포함 50명의 인원이 순식간에, 여러 이유로 떠난다. 계속 내려만 갔다. 

70년대, 강릉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삼척 흥전역과 나한정역 구간의 소위 switch-back 이 시작되는 곳에서 열차가 올라가는 것 같이 않게 갔다가 다시 뒤로 간다.

뒤로 갈 때는 기적(汽笛)소리도 없다. 뒤로 가도 올라가는 것인데, 뒤로 갈 때는 열차가 힘이 없어서 다시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주님은 계속 올려주셨다. 

6. 작년 9월부터 234부흥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장애인주간보호센터의 이름도 ‘부흥’으로 변경하였다.

이곳 도로명이 ‘부흥로’여서가 아니었다. 나 자신이 아내가 그리고 그래도 함께 지켜준 성도들이 부흥을 원하며 변경하였다.

234부흥운동을 매달리듯 다시 시작한다. ‘주님의 방법’대로 함께 예배하는 이들이 늘어간다. 우리는 이를 ‘기적(奇蹟)’이라고 말했다.

이 기적(奇籍)의 기적(汽笛)소리를 내고 싶다. 작은 교회의 끄적임, 혹은 넋두리요 울부짖음 일 수 도 있는 이 소고(小考)가 소고(小鼓)되어  작은 울림이 되기를 바라면서 울리고 두드린다. 허한 속이 너무 답답해서, 기적(汽笛)소리 내고 소고(小鼓)를 쳐본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요 9:1-11).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하시는 주님의 평안의 음성과 함께 ‘장애인과 그 가족’의 울부짖음이 멀리 황소의 울음처럼 낮지만 아주 멀리 울려 퍼지기를 기도한다. 그러면 ‘알려야 되는 짐’을 잠시라도 벗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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