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종 목사(경남지방 ・ 방주교회)

2017년 5월 15일, 경남지방회 축구단을 이끌고 성결교단 목회자 축구대회에 참석했다. 첫날 경기 전반전을 끝내고 휴식을 하던 중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을 느꼈다. 순간, 몸이 휘청하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심폐소생술로 잠시 의식을 찾았지만 연이은 심정지가 왔고, 결국 목포 한국병원 응급실에서 심장 조영술을 받았다.

심근경색이었다. 심장으로 흐르는 관상동맥 한 개가 완전히 막히고, 다른 하나는 좁아져 혈액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새벽 2시, 연락을 받은 가족과 최 집사가 병원에 도착했다. 그제야 의식을 찾은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그들의 얼굴을 보며 ‘정말 큰 일이 일어났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을 감으니 힘든 순간들이 너무도 많았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주님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냥 데려가셨으면 더 좋았겠습니다.”라는 기도가 나왔다.

 

갑자기 찾아온 시련 
목포 한국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성도들은 작정 기도에 돌입하고, 남자 집사 두 분이 돌아가며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를 인도하고, 남녀 집사들이 번갈아 가며 새벽 기도회와 저녁 겟세마네 기도회를 인도했다. '

컴퓨터를 잘 다루시는 여자 집사님이 주보를 만들고, 교회의 전반적인 일들은 직원들이 의논하여 감당했다.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목회자의 빈자리를 채워주어 감사했다. 열흘이 지나자 의사는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나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하니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일단 퇴원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혈압이 오르고 심장 박동에 문제가 생겼다. 부산 백병원 응급실로 갔다. 곧바로 입원하고 검사를 했다. 결과는 부산 백병원에서도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스텐트 시술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백병원에서 3일을 보내고 무작정 서울 아산병원 응급실로 올라갔다. 정 집사님이 내 승용차를 몰고 아산병원으로 올라갔는데 고속도로 중간에서 심장 이상 이 생길까 봐 얼마나 조심스럽게 운전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조마조마하고 조심스러웠다. 


 “목사님 병원비가 많이 나와도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카드로 결제하세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만 잘 받으세요.” 
“목사님 제가 직장 퇴직금을 미리 정산해서 치료비는 마련할 테니 아무 염려 마시고 치료만 잘 받으세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손에 카드를 쥐여주는 성도들의 모습이 아른거려 눈물이 비처럼 흘렀다. 성도들이 정말 고맙고 또 고마웠다. 

아무도 함께할 수 없는 
그 자리 그 시간, 
오직 나 혼자 있어야만 하는 
죽음 앞에 주님이 함께 계셨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아산병원에서 여러 가지 종합적인 검사를 받았다. 뇌 MRI 검사 결과 심장마비로 쓰러질 때 약간의 뇌출혈이 있었는데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평생 냄새를 맡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몸 전체 X레이 검사를 했는데 뼈를 너무 많이 사용하여 80대 뼈와 같다고 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심장에 피를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하나는 완전히 막히고, 다른 하나는 중간중간 막혀서 스텐트 시술로는 불가능하며 심혈관 우회술 수술을 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아산병원은 수술 날짜 잡기가 무척 어려운 병원이다. 어떤 환자는 2년, 3년 전에 수술 예약을 하고 수술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정상적으로 수술 날짜가 나오려면 최소한 두 달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나는 한시가 급했다. 언제 다시 심근경색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고 두 달이나 교회를 비우고, 병원에 입원을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입원한 지 5일 만에 수술 날짜가 잡혔다. 수술하기로 예약된 환자가 취소되어 그 시간이 겨우 났다고 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아닐 수 없었다. 

수술 전날 담당 의사는 여러 가지 수술 중에 일어날 위험성에 대해 알려 주었다. 수술하다가 운명할 수도 있고, 수술 후에 후유증으로 중풍이 올 수도 있고,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너무 위험한 수술이라 보증인도 한 사람으로는 안 되고 가족 중에서 두 사람이 보증을 서야 한다고 했다. 의사의 주의를 들으니 두려움이 몰려왔다.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목숨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 되면 어찌 감당할까?’ 
수술 후, 후유증이 두려웠다. 옆 병상의 환자를 지켜보며 두려움은 현실로 느껴졌다. 목에는 튜브를 끼고 전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내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한 달 동안 병원비가 2억이 나왔다는 말도 겁이 났다.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주님, 이제 저는 축구 못해도 좋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못해도 괜찮습니다. 설교만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살 수 있다면 수술 안 하고 살아가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후유증이 생겨서 저 앞의 환자처럼 된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 같습니다.” 

계속 가슴을 쓰다듬으며 기도했다. 새벽 두 시쯤 되어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 최고의 의료진에게 보냈느니라.” 주님의 음성을 들렸다. 곧 두려움이 사라졌고 평안히 잠이 들었다.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하시는 주님 
다음 날 12시경에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로 들어갈 때, 수술 잘 받고 나오라는 아내의 음성이 울음으로 떨렸다.
‘지금까지 온갖 고생을 다 시켰는데 여기서 내가 죽는다면 아내는 어떻게 살아갈까?’ 

아내는 결혼 후, 김해 시골의 골짜기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며 사모의 역할을 해 왔다. 개척하고 교회를 두 번 건축하였는데 인부들의 식사와 오전 오후 참까지 다 해야 했다. 20여 년 동안 주일 점심 식사를 준비했고, 15년간 금요일마다 노인대학의 점심을 준비했다. 200평이나 되는 예배당 청소를 20여 년 동안 해왔다. 그렇게 고생만 시키다가 내가 훌쩍 떠나 버리면 아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마음이 들어 너무나 애처롭고 미안해 차마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수술 대기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수술을 앞두고 죽을지 살지 모르는 상황에서 심한 두려움과 공포, 불안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한순간 모든 두려움이 썰물처럼 밀려가고 평안함이 찾아왔다.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아무도 함께할 수 없는 그 자리 그 시간, 오직 나 혼자 있어야만 하는 죽음의 문 앞에 주님이 함께 계셨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드디어 수술 방 앞에 도착해서 방 번호를 보니 7번 방이었다. 주님은 방 번호를 통해서도 나에게 위안을 주시는 것 같았다. 마취하려고 할 때 나는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수술을 받다가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의식이 있을 때 기도하고 싶었다. 
“주님 지난번에는 제가 갑자기 의식을 잃어 기도를 못 했습니다. 이제 수술에 들어가는데 혹시 제가 깨어나지 못한다면 주님 품에서 깨어나게 해주십시오. 제 영혼을 주님께 맡깁니다.”

수술 후 새벽 2시쯤 되어 의식이 돌아왔다. 
“정신이 드십니까?” 간호사의 목소리
“아버님 정신이 드십니까?” 아들과 며느리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눈은 떠지지 않았지만 살아있음을 깨달았다. 
“주님 저를 살려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눈물이 흘렀다. 열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정상이었다. 열 발가락도 움직여 보았다. 정상이었다. 
“주님 후유증 없이 수술이 잘 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아침에 인공호흡기를 떼고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돌아왔다. 

 

고통의 이길 힘을 주시는 주님 
일반 병실로 돌아오면 어려운 고비는 다 끝난 것이니 순조롭게 치료받고 곧 퇴원할 줄 알았다. 그건 아무것도 모르고 한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때부터 정말 견디기 어려운 극심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가슴을 가르고, 허벅지를 가르고, 허벅지 혈관을 떼어서 관상동맥 2개를 연결했기에 가슴뼈를 전부 잘라 다시 철사로 엮어 놓은 상태였다. 배에는 배액관 3개를 달고, 링거는 4개를 달았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비스듬히 기댄 상태에서 하루 내내 그리고 밤이 새도록 통증과 씨름을 해야 했다. 교회에 가고 싶었다. 강단에 엎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통증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일이 되었다. 내가 입원한 병실은 13층이고 아산병원 예배실은 3층이었다. 간호사들은 간호사실에서 50미터 이상 떨어지면 절대로 안 된다고 했지만, 간호사들의 눈을 피해 아들과 딸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예배실로 갔다. 배액관 3개를 꽂고, 링거도 2개나 달고 있었다. 예배시간에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찬송가를 불렀다.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십자가 짊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 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를 원합니다.” 

평소에도 많이 부르던 찬송이었다. 그러나 그날 그 찬송은 완전히 나를 뒤흔들었다.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렇게 많이 울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옳습니다. 주님! 주님을 따르는 일이 비록 십자가 지는 것 같은 고생이고, 뼈가 다 닳고, 몸이 다 부서지는 일이라 해도 주님이 나를 위해 해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비록 주님을 예배하다가, 주님을 찬양하다가 내 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주님께 더 나아가겠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감격으로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수술 후 찾아온 통증은 
왜 사람들이 자살하는 지 
알게 했다. 나처럼 고통받는 
이들에게 주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와
 목회 소망이 더 간절해졌다


그 후, 3개월 동안 날마다 극심한 통증과 싸워야 했다. 통증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머리 부터 발끝까지 온몸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아픔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한 달쯤 지나자 심각한 우울함이 몰려왔다. 3개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극심한 통증과 씨름하며 밤에도 누워 잘 수도 없고, 똑바로 앉아 있을 수도 없어 비스듬히 야외용 간이 의자에 기대어 자다가 깨다가를 밤새 반복하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구나, 이렇게 고통스러우면 믿음 없는 사람들은 자살하겠구나!” 왜 사람들이 자살을 하 는지 알 것 같았다. 나를 버티고 있는 건 내가 아닌 주님이셨다. 나처럼 고통받는 이들에게 주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고, 목회에 대한 소망이 더욱 간절해졌다. 

 

주님과 함께! 성도들과 함께!  
3개월이 지나자 통증이 사라지고, 몸도 회복되어 갔다. 주일 낮 예배를 의자에 앉아서 인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는 아무런 후유증 없이 건강하게 회복되었다. 뇌MRI 검사 후 냄새를 맡지 못할 것이라 했지만 냄새를 맡는데 아무런 문제 없다. 7,000만 원의 병원비가 나왔지만, 성도들의 카드는 하나도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셨다. 

이제는 교회의 일을 성도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쓰러지기 전에는 매일 새벽기도회, 저녁 기도회를 나 혼자서 인도했었다. 주일날에는 새벽기도부터 9시 어린이 학생예배, 주일 낮 예배, 오후 1시 제자훈련, 2시 오후 예배, 4시 축구교실, 8시 저녁 겟세마네 기도회를 인도했다. 그러나 지금은 주일날 어린이 예배, 학생예배는 부장들이 인도하고, 모든 계획도 교사들이 알아서 세우며, 교회학교, 학생회 재정도 교사들이 알아서 다 해결한다.

주일 낮 예배는 설교와 헌금기도, 축도 외에는 장로님들이 인도하고, 주일 오후 예배는 집사님들이 돌아가면서 인도하고 나는 설교만 한다. 새벽 기도회는 내가 인도하지만, 저녁기도회는 집사님들이 돌아가면서 인도하고, 금요 심야 기도회도 장로님들과 사모가 돌아가면서 인도한다. 그리고 교회 청소와 주일 날 식사 담당도 집사님들이 돌아가면서 담당을 한다. 다들 직장에 다니며 교회에서 일인 다역을 하지만 그들은 책임감을 느끼고 기꺼이 그 모든 일을 감당하고 있다. 이제는 성도들이 다 동역자가 되었다. 그들은 수고는 주님께서 모두 보상해 주셨다. 쓰러진 2년 후 2명의 장로님을 세웠다. 그들은 야긴과 보아스처럼 교회를 든든히 받치고 있다.

내 몸을 지키고 아끼는 지혜를 얻었다. 회복은 되었지만, 몸을 과하게 사용하는 것은 위험했다. 성도들의 배려로 주어진 시간에 그동안 혹사하기만 했던 나를 돌보았다. 기도와 묵상으로 주님께 더 나아갔고, 독서와 사색으로 말씀의 깊이를 깨달아 갔다. 마침내 10여 년에 걸쳐서 연구한 요한계시록 주석을 완성하여 800페이지 분량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목회자 혼자의 열심이 아닌 성도들의 열정이 가득해진 교회는 날로 성장했다. 케냐에 제2 후원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계속 후원하고 있다. 코로나 때도 모든 공 예배뿐만 아니라 새벽 기도회 저녁 기도회, 심야 기도회까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다 드렸다. 새로운 신자들이 교회에 나왔고, 교회학교 교사들은 매주 토요일 날 공원에 가서 전도하여 교회학교를 부흥시켰다.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지만 1년에 두 번 총동원 전도 주일도 실시했다. 주일날 식사도 거른 적이 거의 없다. 철저하게 방역 원칙을 지켜 가정별로 분리된 공간에서 식사하므로 코로나 환자가 교회를 나왔어도 교회에서 감염된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한다. 내가 쓰러지기 전에는 모든 것을 다 나 혼자 짊어지고 하려 했으나 쓰러진 후에는 성도들이 함께 짊어지고 가기에 효과도 크고, 나도 더 여유 있게 달려갈 수 있게 되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말이 참이었다. 그동안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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