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히. 짤렘)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창 1:26)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에서 ‘형상’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짤렘’을 번역한 말입니다.

‘쩰렘’이라는 말은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사진찍다’라는 말입니다. ‘형상’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짤렘’이라는 말은 현대 히브리어에서 ‘사진찍다’라는 말로 사용하는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짤렘)이라는 말의 뉴앙스를 깨닫는데 꽤 유용합니다. 

예를 들어 보고 싶은 사람들의 사진을 보며 회상에 잠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진이나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자녀가 보고 싶을 때 찍어 놓은 사진을 보며 그리운 마음을 달래곤 합니다. 이 때 우리는 그 사진의 인물 뿐 아니라 그 사진이 찍혔을 당시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연상합니다. 

‘짤렘’이라는 말은 바로 이 이치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것은 단순히 외모가 같다는 의미 그 이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히. 짤렘)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생각나도록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보면서 “야! 하나님은 참 놀라운 분이시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생각’과 ‘마음’과 ‘철학’이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치관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오염되고야 말았습니다. 우리 안에는 미움과 시기와 질투, 살인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발생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건 가운데 죄 없이 죽어가는 민간인들 특히 여성과 어린아이들을 향한 범죄를 보며 인간의 추악함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형상’(히. 짤렘)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우리가 곱씹어 보야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아담이 130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셋’이라고 했습니다 (창 5:3). 성경은 지나가듯이 아담이 셋을 낳았는데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히. 비드무토 케짤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히. 베짤메누 키드무테누 창 1:26)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말씀과 순서만 바뀌었을 뿐 접속사를 제외하면 정확하게 일치하는 대목입니다. 

‘아담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이란 타락하고 왜곡된 본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아담의 형상’을 닮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영을 좇아 하나님의 생각과 가치관을 좆아서 사는 것을 기뻐하기 보다는 육체를 좆는 일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좆기 보다는 육체의 소욕을 좆아 사는 것을 훨씬 더 편하게 느꼈습니다. “왜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는 하나님의 책망에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한 저 여자가 주었다”고 하며 뻔뻔함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갈빗대를 취하여 만드신 아내를 향해 ‘저 여자’라고 말하는 추한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 믿는 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을 향한 결단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철학과 가치관과 인생관이 육체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소욕 즉 예수의 영을 따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으로의 회복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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