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4일은 웨슬리 회심기념일이었다. 1738년의 일이니 벌써 284년이 되었다. 웨슬리의 회심이 우리에게 특별하고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을 통해 그의 회심이 갖는 두 가지의 신학적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존 웨슬리의 회심 체험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가르치는 칭의구원의 본질과 중요성을 신학적으로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구원을 찾는 웨슬리의 노력은 먼저 율법주의의 길로 나타났다. 그는 감옥방문, 가난한 사람들 돕기, 병자들 심방 등 할 수 있는 모든 선행을 행했고,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오후 3시까지 금식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생활비까지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러한 노력 속에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었다.

율법주의적 방법에서 실패한 웨슬리는 이번에는 신비주의적인 노력을 통해 구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외적 행함의 한계를 느끼면서 선행을 멈추고 묵상기도를 통해서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노력 가운데서도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했다.

그렇게 힘든 구도자의 길을 걸었던 웨슬리는 마침내 복음적 구원의 길을 보게 되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대속사역과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신대륙을 오가는 배 위에서 만난 모라비안 신앙인들의 구원의 확신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선교에 실패하고 돌아와 머물던 런던에서 피터 뵐러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오랜 대화 끝에 그 길만이 참된 구원의 길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저녁 런던의 올더스게잇 거리에서 모라비안들이 모이는 신도회 모임에 웨슬리는 참여하게 되었다. 거기서 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웨슬리는 저녁 8시 45분경 자신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신자의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관해 낭독하는 동안,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나 자신이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신뢰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심지어 나 같은 사람의 죄까지도 가져가셨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마침내 웨슬리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된 것이다!

둘째로 웨슬리의 회심 체험은 그의 성결신학이 철저하게 복음적임을 명확히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성결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종종 칭의 구원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웨슬리는 구원을 명확히 칭의 구원과 성화 구원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성화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그 이전에 그리스도를 순간순간 신뢰하는 믿음으로 성화를 얻는 것이라고 하는 복음적 성화론을 전개하고 있다.

참으로 웨슬리 구원론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도리를 가장 균형 있게 설명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더 나아가서 이 구원론을 성도들에게 가르쳤고 사역의 현장에서 성도들이 칭의 구원과 성화 구원을 경험하도록 인도했다. 그의 구원론은 단지 이론이나 원리에 그치지 않고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서 성취되었다.

웨슬리 구원론의 이러한 탁월성은 우리가 다른 구원론적 입장과 비교해보면 단번에 드러난다. 가톨릭교회의 구원론은 성화 구원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율법주의적 구원론이다.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은 칭의 구원을 명확히 강조했으나, 가톨릭 구원론과의 투쟁 가운데서 아쉽게도 성화 구원을 정당하게 강조하지 못했다.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이 가진 이러한 한계는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영향을 주어 성도들의 성화를 제한하는 신학적 족쇄가 되고 있다.

다른 한 편 구원파 이단들은 칭의 구원과 성화 구원을 하나로 동일시하는 바람에 예수 믿으면 죄를 짓지 않는다는 비성경적 주장을 통해 율법 무용론이나 위선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요즘 유행하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NPP)는 성화 구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칭의 구원을 재해석하면서 무력화시키고 있다. 오순절 신학의 일부에서는 성화 구원을 배제하고 중생 구원만을 강조하기도 한다. 

교계와 신학계의 구원론적 혼란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참된 성경적 구원론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웨슬리의 구원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5월 24일은 그래서 우리에게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존 웨슬리가 우리 성결교회 신학의 기둥이 되어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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