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달력엔 인연으로 생겨난 소중한 기념일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다. 하지만 내게는 ‘부부의 날’이 가장 애틋하게 다가온다. 이때쯤엔 우리 부부가 연을 맺던 그날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날, 춘천으로 가는 비포장도로는 눈으로 덮여 길인지 눈밭인지 구별이 어려웠다. 버스가 거북이처럼 꿈틀대며 한나절이나 기어가는 동안 몸이 고드름처럼 얼었다.

강원도청 가까이에 있는 춘천중앙감리교회에서 목회하시는 김 목사님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목사님은 신뢰가 두텁게 쌓인 우리 두 사람의 멘토셨다. 우리는 중고등학생 시절, 각기 다른 지역에서 목사님의 지도를 받으며 자랐다. 돌이켜 보면 목사님은 영적 지도만 아니라 현실 문제, 생활 개혁을 많이 말씀하셨다.

계몽운동가이며 애국심이 투철한 사상가셨다. 과도한 관혼상제 비용, 허례허식이 문제라며 우리 국민이 가난을 벗으려면 의식 개혁을 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목사님의 가르치심이 옥토에 떨어진 씨앗처럼 우리 두 사람 가슴에서 알게 모르게 싹트고 여물었나 보다.

목사님의 소개로 우리 둘이 처음 만나던 날 즉석에서 결혼을 약속하면서 날짜를 한 달 후로 정할 수 있었던 것도, 전통과 격식을 깬 결혼식을 합의할 수 있었던 것도 목사님의 정신교육이 뼛속 깊이 침투하였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그날이 1966년 12월 28일, 수요일이었다. 목사님께서 수요예배 설교를 전도사인 내게 부탁하셔서 ‘혁명가이신 예수’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그 사람은 특별찬양을 했다. 예배 후 목사님이 신도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셨다.

“방금 설교한 청년과 특송을 한 청년이 이 자리에서 결혼 예식을 합니다. 멀리 충청도에서 온 두 사람에겐 가족 (양가 어머니와 여형제 한 사람) 외엔 하객이 없습니다. 춥지만 여러분이 자리를 함께하고 축복을 빌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리둥절한 성도들은 술렁이면서도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목사님께서 성경말씀을 읽고 결혼 서약하고 주례사를 하셨다.

가난한 어머니가 어떻게 마련하셨는지 예식을 시작할 무렵 황금 반지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셔서 그걸 나는 신부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이어서 축복기도 후 예식은 간단히 끝났다.

그날 밤, 안방과 또 하나의 방을 양가의 모녀에게 내어 주시고 서재엔 우리 둘의 신방을 차려주신 후 목사님과 사모님은 어디론가 떠나셨다. 짐작엔 어느 성도의 방 하나를 빌려 주무시러 가셨을 것 같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인사를 하려고 장모님 방문을 노크했지만 기척이 없었다. 문을 열었더니 이부자리만 가지런히 개켜져 있고 사람이 없다. 왜 그렇게 일찍 소리 없이 떠나셨는지 짐작하면서도 충격이 컸다.

신부는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그와 눈을 맞추기가 부담스러웠고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해야 할지 난감했다.

장모님은 서대문 호산나 제과점에서 처음 뵐 때부터 밝은 표정이 아니셨다. 차 안에서도 춘천 도착 후에도 식을 마치고 나서도 말씀이 없으셨다. 그분에겐 생애에 가장 괴롭고 참고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스러운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새벽 첫차를 타고 집에 가시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곤 그 길로 몸져누워 일주일을 앓으셨다.

칠 남매를 키우면서 가장 예뻐하고 기대가 컸던 셋째 딸의 배신, 자식 중에 엄마를 제일 많이 사랑하고 수족처럼 말 잘 듣던 딸의 고집에 당신이 굴복당한 패배, 뜬눈으로 보물단지를 도적맞은 허망함을 참고 참으며 따라왔다가 이웃집 잔치 구경 온 노인처럼 그 생경한 결혼예식을 뒷전에서 보면서 쌓인 분노가 폭발하고 억장이 무너지셨다.

혁명 전사처럼 출발한 우리들, 온갖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며 55년 5개월의 긴 세월을 함께 살아준 아내가 한 없이 고맙고 또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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