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학과 6.25 피란, 그리고 목사 안수

정승일 전도사는 목포교회에서 사역을 하다 설교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처음으로 느꼈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성경해석을 하고 잘 설명하는 강해식 설교를 했으나 주일 저녁예배나 수요기도회에 나오는 신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이성봉 목사의 설교와 달라 재미가 없는 설교라는 것이다 그는 오랜 고민 끝에 부흥회를 마치고 토요일 저녁에 오시는 이성봉 목사님께 가서 상의했다. 그 결과 그는 교회를 사직하고 다른 신학교에 가서 학사 편입을 해서 설교학과 신학을 더 배우기 위해 서울로 떠났다.

그래서 이성봉 목사도 새로운 결단을 해야 했다. 매주마다 초교파적으로 부흥회에 가기 때문에 주간에 그를 대신하는 부교역자가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도 목회를 떠나 부흥회만 전심을 해야 했다.

이성봉 목사도 직원회에서 사의를 표할 것이니 좋은 후임 목사를 찾아보라며 1949년 8월에 사임했다.

그러나 비록 목포가 한반도의 남쪽 끝이지만, 기차의 출발지이고 또한 이곳 주민들의 인심이 후해서 이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성봉 목사가 1932년에 전도사로 북교동교회의 셋집 교회에 부임해 석조건물 교회를 건축하고 4년 간 부흥시킨 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근처에 셋집을 얻어서 가족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정승일은 서울로 가서 우선 거처를 마련한 후, 그 길로 장로교신학교 3학년으로 학사편입을 했다.

주일에는 성결교회의 설교 청탁을 받아 설교를 했으나 설교하지 않는 주일은 이름 있는 큰 장로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여 은혜 받고 목사들의 설교에 대해 연구했다.

그 중에 신의주 제2장로교회 목사였던 한경직 목사가 해방 후 공산주의 핍박을 받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여 개척한 영락교회를 자주 갔다.

그는 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개척한지 10년 만에 당시 한국 제일 큰 교회로 성장시킨 비결이 그의 설교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1950년 5월에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가족과 함께 목포에 사시는 장인어른을 만나러 와서 한 달 간 지냈다.

그동안 목포교회는 1949년 9월에 서울 청파교회 김동완 목사가 33세의 나이로 북교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시무하고 있었는데, 평소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쉬는동안 북한군의 침공으로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좀 지켜보려 했는데 인민군이 전북까지 내려온다는 소식에 당황했다.

다행히 목포 해군부대 기사로 일하는 최집사가 군인과 함께 부산으로 가는 표 두 장을 얻었다. 이성봉 목사와 김동완 목사의 몫이었다.

이 소식에 이성봉 목사는 고개를 흔들며, “나는 늙은이로 오래 살았으니 죽어도 괜찮다. 젊은이들이 오래 살아 하나님 일에 더욱 힘써야한다‘며 사양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젊은 두 사람이 가족을 두고 급히 부두로 가서 해군의 배에 승선하여 부산으로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목포에 남은 이성봉 목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밝혔듯이 공산당들에게 붙잡혀 모진 구타를 당하였다.

그들이 몽둥이로 몸을 자꾸 때리면 “예수, 예수”했다. 이상해서 그들이 묻자 “내 속에 예수로 가득 차 있어 때리니 예수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러니 너희도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라”하고 전도하니, 그들이 웃으며 구타를 중지했다는 일화다.

정승일과 김동완 목사는 부산에서 전국에서 피난 온 교역자들과 함께 수정동교회에서 제공한 숙식을 하며 교회를 돕다가 정 전도사는 1951년 4월 부산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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