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의 과정과 월남, 그리고 헌신

1940년대의 전반기는 역사적으로 세계의 전쟁 시기였다. 서양은 독일의 나치군이 1938년 인근 폴란드에 대한 무단 침략으로 전 유럽국가들과의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처음 5년간 나치에 의해 영국을 제외한 유럽국가들이 거의 점령당했다. 이것을 세계 제2차 전쟁이라고 부른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아시아 석권을 목표로 1937년 중국 난징에 침략전쟁을 일으켜 계속 동남아로 진격하다 석유 문제로 미국과의 갈등이 생겼다. 이에 일본은 내각을 군부체제로 전환, 1941년 12월 7일에 미국령 하와이 진주만 해군기지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1945년 8월에 미군 폭격기가 6일에 원자탄을 일본 히로시마에, 9일에 나가사키에 폭격하여 무려 30만 이상의 인명과 모든 건물이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그런 파괴력을 지닌 미국과 전쟁을 한다는 것은 일본의 폐허와 멸망을 재촉하는 것을 의미했다.

군수물자의 부족으로 계속 해상에서 연패를 당하던 일본의 내각은 더 방심하면 동경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마침내 일왕의 동의하에 항복한다.

그날이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일본 왕의 항복 선언문 낭독이 라디오로 방송되자, 한반도는 36년 만에 해방되었다.

한반도 남한 전역에서 ‘해방 만세’의 우렁찬 기쁨의 함성이 번져갈 때 북위 38선 이북은 이미 8월 13일에 북에서 밀고 내려온 소련군대에 의해 점령이 되었다. 그리고 해방군의 자격으로 김일성을 내세워 인민위원회를 조직, 공산화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태평양전쟁이 장기화되자 미국과 영국은 전쟁을 빨리 종식하기 위해 소련을 설득했다. 당시 태평양은 미국 해군이 장악했으나 중국 만주에 진출한 일본 육군이 문제였다. 만일 소련이 연합군에 가담해 밀고 내려온다면 일본군 항복은 식은 죽 먹기였기 때문이다.

평소 한반도 진출을 꿈꾸던 소련은 갑자기 소련의 얄타로 미, 영 대표를 초청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개최했다. 그 결과 소련이 참전키로 하되 그 대가로 북위 38선 중심으로 남은 미국이, 북은 소련이 점령하여 신탁 통치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소련은 즉시 참전하지 않다가 8월 초 미국의 원자탄 투하로 전의를 잃은 일본군을 보고 승산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8월 9일에 갇힌 죄수들을 군인으로 동원 만주의 일본군에게 선전포고하고 항복 받은 후, 한반도에 밀고 내려와 북한을 13일에 점령했다.

공산 치하가 된 북한은 먼저 친일분자들을 처단하고, 후속 조치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공산세력에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곳은 교세가 강한 신의주였다.

그해 11월 23일 신의주 제2교회 학생들 중심으로 시내 6개 남녀학교 학생 약 1천 명이 반공-반소를 외치며 평화적 시위했으나 소련군의 총질로 사망 23명, 부상자 7백여 명, 1천 명 이상이 체포 구금되었다.

이 사건을 목도한 정승일은 북한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서울에 진주한 미군의 민주화로 서울에 일본 강점기에 폐교된 서울신학교가 학생을 모집한다는 것을 목사님을 통해 알고, 부모의 승낙으로 소련군이 지키는 38선을 뚫고 서울에 가서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이듬해 2월에 다시 38선을 넘어 고향에 가서 가족 모두 함께 월남할 것을 권유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할 수 없이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다시 38선을 넘는 고통을 통해 남한에 와서 서울에 정착했다. 그리고 3년 간 기도훈련과 공부 끝에 1948년에 졸업, 전도사가 되었다. 그때 마침 장인인 이성봉 목사님이 전남 목포북교동교회의 담임목사였다.

그러나 워낙 유명한 부흥사이기에 초교파적으로 매주 부흥회를 인도해야 하므로 사위 정승일 전도사를 부교역자로 청빙했다. 그래서 그는 목포북교동교회에서 부교역자 사역을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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