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신앙생활

정승일 목사는 일제가 강점하던 1922년 12월 21일에 평안북도 용천군 용암포 읍에서 정의근 씨와 이광윤 씨를 부모로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닮아 키가 크고 훤하게 잘생긴 용모를 지녔으며, 말과 행동도 의젓하여 ‘꼬마 어른’으로 불렸다.

용천군은 평안북도 압록강 하구의 동쪽 언덕을 차지한 군으로 예부터 농업과 수산업의 발달로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난 곳이다.

중국과 압록강을 사이로 둔 접경지역으로 북부는 신의주에 잇대어 있어 주민들은 학업, 직장, 장사 등으로 신의주를 이웃집처럼 드나들었다.

이곳은 예부터 지리적으로 유명해 속담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바로 용천(龍川)을 뜻하는 말이다. 근세기에 유명한 독립투사 김홍일 장군, 애국자 함석헌 선생, 단국대학 설립자 장춘식 박사와 함께 종교적으로 정승일 목사가 이곳 출신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신의주로 이주하여 7살에 신의주보통학교(초등)와 신의주고등보통학교(중학 5년)을 졸업했다.

그는 어학에 소질이 있어 일본어는 물론 영어 실력도 뛰어나 교사들이 칭찬할 정도였다.

그는 곧 작은 회사에 근무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았다. 그의 신앙생활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그가 11살이던 1931년 4월에 신의주 동부성결교회의 노방전도단의 북소리와 전도 설교에 끌려 교회에 갔다가 부흥회 설교에 감동을 받은 아버지의 결단으로 온 가족이 교회에 등록하게 되어 교회학교 학생으로 열심히 다녔다.

               정승일 목사
               정승일 목사

아버지가 1937년에 장로로 장립하였으므로 이제 그도 장로의 가족이 되어 모든 면에 더욱 성실해야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몇 년 동안 동부교회의 교역자는 전도사 신분으로 세례식 거행을 할 수 없었다. 당시는 서울 총회본부에서 전국의 교역자를 파송하는 제도였다.

그러다가 1942년에 은혜가 충만한 부흥사로 소문이 난 김 목사(만주 봉황장로교회)를 부흥강사로 초청, 은혜를 받음과 동시에 밀려있던 신자들의 세례식까지 김 목사의 주례로 거행했다. 아마 정승일도 이때 세례를 받은 것 같다.

그는 23세(1944)에 당시 동부교회 한성과 목사의 중매로 부흥사 이성봉 목사의 장녀 이원숙 양과 결혼했다.

이성봉 목사는 신의주동부교회 목사(1936~1937)로 1년 만에 2층 교회를 건축하고 5백명 신자가 모이는 부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총회에서 부흥사로 임명된 초교파적 대 부흥사로, 교회를 사임하고 전국 초교파 부흥사로 많은 영혼을 구원했다.

이때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 모든 출판물은 사전 검열받은 후 배포되었는데, 성결교회의 기관지 월간 활천이 저들의 주목이 되었다.

당시 활천의 목차에는 유명 목사들의 설교와 서울신학교 교수들의 성경강해가 주를 이루었다. 긴박한 시국으로 고통받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는 주제가 사중복음 중 ‘재림’ 설교와 강해였는데, 그만 재림 설교가 검열에 걸렸다.

그들은 일본의 왕이 천하의 왕인데, 주님이 재림하시면 세상의 모든 왕도 예수님께 심판을 받는다는 메시지에 아연실색했다. 그래서 일제는 1942년 12월호를 끝으로 폐간을 통고했다.

그리고 1943년 4월 서울신학교 폐교, 5월 성결교회 교역자 전원 구속해 고문, 9월 전국성결교회 폐쇄, 마침내 12월 29일부로 성결교회의 해산을 명령했다.

당시 전국의 성결교회가 약 200여 교회였는데, 해산되어 수감된 교역자들이 출소해 보니, 교회가 폐쇄되고,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장로교나 감리교회로 흩어져 다녀야 했다.

정승일의 가족도 신의주 장로교회에서 예배드리며, 해방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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