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말씀과 기쁨

박물관에 가 보셨습니까. 박물관에는 하나만 내다 팔아도 로또 복권처럼 인생 역전을 가져올 수 있는 보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보물들은 유리 상자 안에 있거나, 유리 칸막이가 된 전시실 안에 있습니다. 그 보물들이 밖으로 나와 공기와 접촉하고, 햇빛에 노출된다면 부스스 바스러지고 한 줌의 먼지로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유리 상자 옆에는 작은 글씨로 설명문이 붙어 있지만, 그 작은 글씨를 눈여겨 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충 보물을 눈으로 몇 번 훑어보고 지나갈 뿐입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간입니다. 무섭고 참혹한 고난이 있고, 죽으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부활입니다. 부활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고 할 만큼 중요하고 또 중요한 것인데, 오늘 우리는 이 부활의 의미를 얼마나 알고, 깨닫고 있습니까.

올해 역시 부활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어김없이 이 부활의 사건을 얘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박물관 안내원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박물관 관람객이 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살면서 부활에 대해 무관심했고, 내 삶에서 아무 관련도 없던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주일이 되었기에 의례적으로 절기에 따라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고 어떻습니다”라고 설명 듣는 일에 지쳤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그만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전달하는 얘기, 부활은 사망권세를 이기고, 승리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나게 하고, 되새김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이제 그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다시 질문합시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내 손에 주어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내 삶의 현장에서 내 인생을 역전 시킬 수 있는 하늘의 보물인데,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내 삶에 어떤 일을 만들어 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오늘 내 인생에 어떤 대역전의 일을 만들어 냈습니까?

먼저 부활은 말씀의 사건입니다. 즉 말씀이 강력하게 살아 역사하고 흘러넘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말씀의 3중 역사가 사마리아 성에 일어납니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가서 예수님을 전파합니다.”(5절) “사마리아 사람들 중에 그 말씀을 듣는 일이 일어납니다.”(6절)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말씀을 들은 그 사람들이 말씀을 좇았다, 즉 삶에서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7절) 이것이 말씀의 3중 역사입니다.

첫 번째 말씀이 선포됩니다. 두 번째 그 말씀이 사람들 가슴에 파고들어 그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세 번째 결국 사람들이 말씀 따라 살아가고, 움직이고, 행동하게 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가 고침 받은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베데스다 연못이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며 38년을 누워 있던 한 병자에게 어느 날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 오셨습니다.

그 병 자에게 멋진 두루마리 성경책이 주어졌다고 하지 않았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책이 아니라그 말씀을 하신 당사자가 오셨습니다. 그 주인공이 오셔서, 실제적인 그 음성으로 그 병자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을 한마디 하셨습니다.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38년 동안 한 번도 걸어 본 적 없던 사람이 일어나 걸었습니다. “말씀이 흥왕한다, 말씀이 살아 역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사람이 움직여 행동하게 되는 것, 이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이 금박으로 되고, 멋진 인쇄와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으면 뭐 합니까? 설령 형광펜으로 긋고, 색연필로 긋고, 열심히 성경을 읽었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그 성경책에서 살아 걸어 나와 여러분의 눈물과 고통과 절망과 한숨과 낙심과 쓰러진 그 현장에서 “일어나라, 걸어가라”는 말씀을 하시는 일이 없다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 지르며 나가고…”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그 현장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그곳에 죽음의 그림자들, 사망의 손길들이 어찌 버틸 수 있겠습니까? 

말씀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니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더럽게 만들고, 성결하지 못하게 만드는 귀신들입니다. 욕심과 이기심과 염려와 두려움, 교만과 허영심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경박하고 천박한 신자가 되게 만듭니다.

7절 후반을 보십시오.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여기에 나오는 병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살아서 사람들 삶에서 마음껏 자유로이 운동하기 시작하니 이 사람들이 일어나고 걷게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말씀의 부활은 우리를 건강하게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듭니다. 저절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서 고질적으로 되었고, 만성이 되었다 할지라도 고쳐지고 변화되고 바뀔 것입니다.

만약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말 그 말씀은 박물관 유리 상자 안으로 들어가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말씀은 분명한 그런 능력과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박물관 관람객 태도를 버리면 됩니다. 설교나 말씀을 듣는 일을 박물관 안내원이 하는 소리로 듣고 있는 그 자세에서 벗어나면 됩니다.

마지막 8절입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예수님의 부활, 말씀의 부활은 최종적으로 기쁨을 가져옵니다. 기쁨이 나비처럼, 꽃향기처럼 날아다닐 것입니다. 큰 기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최고의 기쁨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 기쁨입니다. 찬양과 예배와 기도와 섬김과 용서를 이끌어 내는 기쁨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셨습니다. 즉 이 땅에 오셨습니다. 추상적이던 주님이 실제로 보고 만날 수 있는  분이 되어 주셨습니다. 추상적이던 말씀이 내 삶에서 기쁨으로 체험되고 열매 맺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오늘 이곳에서 경험하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박물관에 있는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내 삶의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부활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의 삶에서, 마음에서 춤추게 하십시오.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믿으시고 말씀에 소망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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