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존경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양치는 목동에서 최고 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그에게 특별한 기적은 없었다. 그냥 울고, 웃고, 쫓기고, 싸우는 이 땅의 일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라고 그의 삶을 정의했는지 모른다. 

다윗도 세월을 피할 수 없었으니, 다윗이라면 말년에 어떤 일에 관심이 있었을까? “다윗이 나이가 많아 늙으매 아들 솔로몬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이스라엘 모든 방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았더라”(대상 23:1~2)

다윗은 솔로몬을 왕으로 삼고 회막 앞에서 그리고 새로 지어질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조직하기 위해 그의 마지막 열정을 불태운다. 30세 이상의 레위인들을 뽑아서 육천 명은 관원과 재판관으로, 사천 명은 문지기로, 사천 명은 여호와께 찬양하는 일을 맡게 했다.

드디어 오늘은 찬양대를 조직하는 날이다. 군대 지휘관들과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는 일을 맡겼다. 여기 아삽의 아들들이 나온다. 여기 헤만의 아들들이 등장한다.

여기 여두둔의 아들들이 줄 서 있다. 사천명중에서 최종 이백팔십팔 명을 뽑았으니 모두 웬만한 실력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물론 그렇다고 실기 능력만 갖춰서는 안 된다. 영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들을 그렇게 뽑아서 노래하게 했던 것이 바로 ‘신령한 노래’ 즉, 예언하는 찬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다 그들의 아버지의 지휘 아래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아 여호와의 전에서 노래하여 하나님의 전을 섬겼으며”(6절) 여기서 그만 나는 원초적 영성에 부딪히고 만다. 그렇다. 모두가 다 그 아버지의 지휘 아래 그 아들들이 찬양을 하고 있다.

아버지가 지휘하고 아들이 노래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눈이 마주친다. 이것은 뭐 숨길 수가 없다. 요즘 아들 녀석이 얼마나 속 썩이는지 아버지는 다 안다. 아버지가 오늘따라 자식들에게 얼마나 화를 냈는지 아들들도 다 안다.

아버지 앞에서 노래하는 아들이나 아들 앞에서 지휘하는 아버지나 신령한 노래를 하기 위해서는 성전에 오기 전에 이미 가정에서 결정되어야 했다. 그의 삶이 그러해야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가 정해지지 않겠는가!

아니 어쩌면 반대로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집은 성전 예배를 마치고 돌아갔을 때 그 집이 비로소 신령한 집안이 될 수 있었다.

작곡가의 악보가 연주라는 과정을 거쳐서만 음악으로 완성되듯이, 네이선 미첼에 따르면 예배는 “불확정적”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할 때 비로소 그날의 예배가 확정되는 것이다.

어느 주일 오후였다. 나와 아내는 탁자에 앉아 어떤 일에 대해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아들 녀석이 우리 곁을 지나다 멈추고는 헛기침을 하더니 대뜸 ‘수군수군하는 자여’라며 쏘아붙이고는 화장실로 내뺀다.

‘아니 저 녀석이’ 내가 변명하려던 말은 아들의 뒤통수 근처에도 못 따라갔다. 그날 설교 본문은 로마서 1장이었으니 “…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여?’ ‘앗 뜨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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