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득의의 뿌리란?

       홍성철 박사
  (세계복음화연구소)

한글성경에서 ‘믿음,’ ‘믿다’는 표현이 구약에서 74번 그리고 신약에서 555번 나오는 것을 볼 때, 믿음은 분명히 신약에서 강조되는 표현이다. 그렇다고 신약에 그렇게 많이 나오는 믿음이 아무 근거 없이 불쑥 나타난 것은 아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믿음의 근거는 구약인데, 그 구약의 창세기에 묘사된 아브라함의 믿음이 뿌리이다. 그런 이유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믿음의 뿌리가 되었는가?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이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그는 그 부르심에 응하여 고향을 떠났는데, 그런 적극적인 호응을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라고 해석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그것은 아브라함이 구사한 첫째 단계의 믿음이었다.

첫째 단계의 믿음이 신약의 해석인 것과는 달리 둘째 단계는 아브라함이 실제로 구사한 믿음이었다. 그는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 아들을 필요로 했는데,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서 그를 불러내신 하나님이 다시 그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인간적으로 이것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약속이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주저하지 않고 믿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그의 믿음은 창세기에서 나오는, 그러니까 성경에서 나오는 최초의 믿음이었다.

이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구사한 믿음이 신약에 나오는 믿음의 뿌리인데,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사실 때문이다. 그의 믿음을 통한 의는 신약은 물론 개신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곧 이신득의의 뿌리이다.

바울 사도는 반복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한 의를 실례로 들면서 이신득의를 설명했다(롬 4:3, 9, 11, 갈 3:6, 8).

비록 아브라함의 믿음이 믿음의 뿌리였지만, 그래도 그의 믿음은 자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현장에서 실현되는 경험을 통해서 자라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의 증언을 보자.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살후 1:3).

아브라함의 믿음이 차차 자라서 그 절정을 이룬 것은 그의 아들을 번제물로 바칠 때였다(창 22:2). 아들을 꼭 필요로 하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칠 수 있었는가? 그것도 역시 그의 믿음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셋째 단계의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은 도대체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면서 무엇을 믿었단 말인가? 히브리서 저자의 해답을 보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 19). 그렇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죽더라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아브라함이 믿은 부활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확인해주었다. “… 그(아브라함)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다. 아브라함이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처럼 (약 2:21~23),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면 우리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롬 4:23~24). 참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신득의의 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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