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신학대학의 교수가 아내로부터 들은 이야기- 투옥된 교수가 감방 동료 도적과 탈옥을 결행하던 밤, 기와 지붕을 살금살금 기었다. 앞서 기던 도적이 실수로 기와를 땅에 떨어뜨렸다. 간수가 지붕을 올려다 보며 “누구야” 했다. 위기의 순간, ‘야옹’ 소리가 메아리쳤다. 영락없는 고양이 울음이어서 위기의 순간은 지났다. 교수가 같은 실수를 범했다. 간수가 “누구야” 하자 교수는 “고양이에요”했다.(황성규, 『가시관의 예수』)

▨… 이 이야기의 초점은 청중을 웃기려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웬만큼 한 사람이라면 다 짐작할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예수께서는 ‘야옹’ 하셨는데 2000년 동안 신학과 교회는 고양이로 해석함으로써 본래의 것에서 멀어졌거나 이탈했을 가능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황성규 교수는 정리했다.

▨…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는 고난주간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께서 당하신 고난의 흔적, 그 성흔(stigmata)을 나에게도 허락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고백하지만 그 고백이야말로 ‘야옹’이 변하여 ‘고양이에요’가 된 제멋대로의 고난 이해가 아니라고 뉘라서 감히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따르며 주님의 고난을 내 몸에 채우겠다는 우리의 말, 행동, 생각 하나 하나가 다시 그분께 십자가를 지게하는 창이 되고, 못이 되고, 가시가 됨을 뉘있어 감히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가.

▨… 그런가 하면 도스토옙스키는 신앙인입네 하는 사람들을 향해 가차없이 철퇴를 휘둘렀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은 감옥의 그리스도를 찾아가 말한다. “당신이 인류에게 남긴 짐, 즉 진리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짐은 인간이 지기에는 너무 무겁다”고. 따라서 인간에게 그리스도는 더 이상은 필요없는 존재라고 밀어부친다. 인간은, 그 본성에서 파악할 때, 애초에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 지금 성결인들은 도스토옙스키에게 압도되어서가 아니라 우리 교단 법과 사회법을 오가며 줄타기 하는 ‘총무 문제’를 보며 그리스도를 허상으로 만드는 신앙이라는 이름의 오만에 좌절한다. 성결인들은 묻는다. 십자가는 정녕 더 이상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진리인가. 우리가 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인가. 예수께서는 ‘야옹’하셨는데 우리는 계속 “고양이에요”라는 해석에만 머무를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신앙이라는 이름의 오만까지도 용납해 주시리라 우리는 믿는다. 대심문관까지도 안아주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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