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침체의 때에

시편 42편에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라고 하는 신앙인의 탄원은 신앙인도 자칫 영적 침체기를 겪을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민수기에 보면 양식, 물이 부족한 광야에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공급에도 불구하고 단조로운 식탁 메뉴로 인해 염증을 느낀 백성들이 불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들은 모세는 (민 11:10) “... 기뻐하지 아니하”였다고 반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세가 기뻐하지 않았다’ (히. 우베에이나이 모쉐 라아 민 11:10)하는 말을 직역하자면 “모세의 눈에 보기에 좋지 않았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국어성경에서 “모세가 기뻐하지 않았다”는 말로 해석을 한 듯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뻐하지 않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베이나이 모쉐 라아’에서 ‘라아’라는 말은 모세가 공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그 백성의 행동에 대해서 단순히 기뻐하지 않았음을 표현한 말이라기 보다는 현재 벌어진 상황과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 모세의 마음이 매우 상해 실족해 있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어지는 모세의 탄원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모세는 (민 11:11)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하레아타)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심지어 (민 11:15) “…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히. 베라아티)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할 만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해 너무 힘들어 괴로워 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모세가 기뻐하지 않았다’는 말 보다는 “모세는 괴로워했다”라는 말이 오히려 더 원문에 가까운 해석입니다.

NIV도 이와 같은 견지에서 해석하여 읽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모세는 백성들로 인해 깊은 영적 침체기를 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반드시 영혼의 침체기가 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의 귀신을 내쫓은 일로 그 주인에게 고발을 당해 매를 맞고 착고를 차고 옥에 들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바울은 감옥에서도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가 강하게 임하고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짐과 동시에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힘으로는 환경을 바꿀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무슨 재간으로 강한게 닫힌 옥문을 열고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늘을 바라볼 때 주의 임재 가운데서 자기를 결박하던 모든 것들은 풀어지고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할 때 육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됩니다. 그러나 하늘이 아닌 땅을 바라보면 영적 침체가 옵니다. 다윗도 땅의 것을 바라보다가 영의 침체가 왔습니다.

안목의 정욕으로 남의 아내를 빼앗고 충성된 자를 죽였던 사건이 빌미가 되어 그의 자녀들은 이복 여동생을 범하는 사건을 일으키고, 자신을 향해 쿠테타를 일으켰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다윗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그가 다른 사람보다 물맷돌을 더 잘 돌려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군대에 ‘투석병’이라고 하는 조직이 구성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다윗외에도 물맷돌을 잘 이용하는 군사는 얼마든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다윗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가 3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자칫 영적 침체기에 접어들 수도 있는 고갈된 시대의 환경에서 오직 하늘을 향해 눈을 들고 살아가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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