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 탄압과 학살 연구’의 의의 -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진실·화해위원회의 위탁을 받아 연구한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 탄압과 학살연구’는 예상외로 각종 주요 언론들의 관심 가운데 보도되었다.

지금까지 이 분야의 연구가 주로 6.25전쟁에서 국가권력(군인과 경찰)에 의해서 희생된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비하여 이 연구는 지금까지 일반인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적대 세력(인민군과 좌익세력)에 의해서 희생된 사람들을 조사하고, 그 내용과 희생 범위를 밝혔기 때문에 많은 언론이 여기에 관심을 가졌다고 본다.

한국전쟁 시기 기독교는 소위 인민군의 중요한 공격대상 중의 하나였다. 기독교인들은 군경가족, 반동 유지와 더불어 인민군의 주요 공격대상이었다는 것이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서울대 정근식 교수도 한국전쟁 당시 “좌익 테러의 대상은 여느 지역에서나 마찬가지나 기독교 교회가 포함되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문제는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정부 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는 제2기를 시작하면서 이 점에 주목하여 본 연구소에 연구를 의뢰해서 그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왜 인민군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학살했는가? 근본적으로 기독교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해방 직후부터 북한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강력하게 김일성의 공산정부에 반대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민군은 기독교를 친미세력으로 생각하였다.

당시 인민군은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고, 남한에서 가장 미국과 밀접한 집단이 교회였다. 실제로 한국 기독교는 해방 직후부터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앞장섰다.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을 지지했고, 각 지역의 유력한 목사들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싸웠다. 이런 것들을 잘 알고 있는 인민군들은 기독교인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박해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해방 직후부터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기독교 제거 작전이 시작되었다. 6.25전쟁을 시작할 때 이미 북한에는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김일성은 전쟁을 시작하면서 반동 세력의 제거를 명령했고, 여기에 기독교인들이 포함되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 서울과 남한을 점령한 인민군은 남한의 기독교를 공산주의화하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여기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였고, 인민군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1950년 9월 26일(추석), 인민위원회는 반동 세력을 제거하고 철수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이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학살을 가져왔고, 수많은 기독교인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같은 내용은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내용이었다. 여기에 정부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본 연구소에 이 과제를 위탁해서 정부 차원의 최초로 연구가 진행되게 되었다.

이 연구가 기존의 연구와 다른 점은 정부의 공식적인 과제로서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연구는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이 연구가 계속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필자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한국 기독교가 끼친 공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소련은 북한에 인민공화국을 세우려고 했지만 오래 동안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들은 기독교인들은 남한에 민주공화국을 세우기를 원했다.

남한의 기독교인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만 진정으로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은 이승만과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북한의 남침에 맞서 대한민국을 수호하려고 했고, 그 때문에 6.25 전쟁 때 희생을 당한 것이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 소련과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아직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도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위태롭게 하는 세력이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해방 직후 그리고 6.25 전쟁을 통해서 한국 기독교가 취했던 위대한 행동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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