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쒀서 개 준 꼴’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기껏 해 놓은 것이 엉뚱한 사람만 이롭게 했다는 상황판단에 대한 표현입니다.

죽이란, 쌀이 부족할 때 곡물에 여러 가지 다른 재료를 넣고 양을 늘려서 먹는 방법이고, 또 하나의 경우는 중한 질병으로 소화력이 떨어질 때 부드럽게 하여 먹는 음식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밥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시간과 정성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빈곤한 삶의 시기에 가족을 위해 바닥에 눌어붙지 않게 팔이 아프도록 저어서 어렵사리 만든 죽을 개가 먹었을 때, 병들어 누워있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며 정성껏 쑨 죽에 그만 ‘코를 빠트려’ 개나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허탈할 수밖에 없겠지요.

가족 못지않게 아끼고 돌보며 키우던 개가 미워질 수도 있겠죠. 먹을 자격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은 개가 죽을 먹게 된 상황이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죽을 먹는 개도 그럴까요?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본다면(易地思之) 개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동물이 사람에게 다가와서 그렇게 도와준 존재가 있을까요. 어린 시절에는 애교로 사람을 즐겁게 해 주고, 자라서는 모두가 안전히 잠들 수 있도록 지켜주고, 사냥을 하거나, 주인이 위험하면 목숨을 바쳐 지킵니다.

개의 관점에서 보면 정성껏 만든 좋은 음식은 자기가 먹는 것이 당연합니다. 문제는 사람이 개의 충성과 헌신을 하찮게 여기고 고마워하지 않거나 잊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두로 지방에 가셨을 때 귀신 들려 고통을 당하는 어린 딸을 고쳐달라며 그 발아래 엎드린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자는 그 여인이 수로보니게(수리아+페니키아) 족속이라 밝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죽 쒀서 개 줄 수 있나......”라고 하셨습니다(막 7:27).

그러나 여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옳습니다, 주님! 그러나 개들도 가족으로 함께 살면서 차례를 기다리면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라도, 배불러 남긴 여분이라도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 너는 자녀를 위해 쑨 죽을 나눠 먹을 자격이 충분하다.”라며 그녀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마 15:25).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론』에서 종교가 바로 절대자에 대한 ‘절대 의존적 감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종교란, 한계도 없고 멈추지도 않는 절대적인 힘의 흐름으로서의 우주에 대한 직관적 감정입니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은 절대자가 창조한 무한한 우주의 힘과 작용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으며 이에 압도되고 경외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며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절대 의존적 감정’이 바로 종교의 본질이라고 하였습니다.

노력의 결과든, 지혜로운 선택이든, 순리적인 상황의 산물이든 우리는 재물, 명예, 권력 등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많고 적음, 크고 작음은 소유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다릅니다.

다른 이는 그가 가진 것이 많다고 부러워하지만 자기는 적다고 불평합니다. 직장에서 이룬 성과에 대하여 죽을 쑤는 일에 가장 공로자인 자기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여기면서 분배에 대하여 투덜거립니다.

개는 죽을 먹으면 안될까요? 토끼를 사냥한 개는 고기를 먹으면 안될까요? 죽은 꼭 쑨 사람이 먹어야 할까요?

주님은 죄인-아니, 바로 나에게 자기의 살을 찢어 빵으로 당신의 흘린 피를 음료로 주셨습니다. 스스로 감당하신 고난의 밤과 배신의 아픔,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죽을 쑤는 일에 나를 돕고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협력한 사람들을 잊지 말고, 기꺼이 나눠 주고 그것조차도 아깝지 않고 즐거움으로 여기는 주님의 마음으로 죽 쒀서 개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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