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가 들려준 한 우화가 있습니다. 바로 ‘고슴도치의 우화’입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서로의 온기를 위해 몇 마리의 고슴도치가 모여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나 추워서 서로 옹기종기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서로의 온기로 추위를 녹이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고슴도치가 어떤 동물입니다. 날카로운 가시를 가지고 있는 동물이었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서로가 모이면 모일수록 그들의 바늘이 서로를 찌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떨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로 고슴도치들을 다시 모이기 시작했고, 다시 가시에 찔리기를 반복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모임과 흩어짐을 반복한 고슴도치들은 다른 고슴도치와 '최소한의 간격을 두는 것이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몰려드는 추위에 고슴도치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비롯된 개념이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emma)입니다.

요즘 문제는 너무나 멀어진 거리두기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온통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강조하지만 그러다 보니 “눈도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을 때론 피부로 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밥 한번 같이 먹자”는 것을 말입니다. 최근에 여러분은 가족 말고, 누구와 함께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해보셨습니까?

현대인의 인간관계 속에 잘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 다음에 밥 한번 같이 먹자”입니다. 어쩌면 그냥 인사치레일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실 인간 사회 속에서 밥을 먹는 것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밥을 함께 먹는 행위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관계가 설정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무엇을 먹느냐와 어디에서 먹느냐가 관심사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때는 사실 먹는 것이 워낙 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함께 식사하는 대상이 더 중요시 여겨지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혼자 하신 것이 아니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사람들과 함께 하신 식사는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논란과 비난 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에게도 식탁과 음식을 함께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의 허물을 들춰내고 공격하기 원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한 중요한 워딩(wording)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0절에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런데 예수님의 식탁에선 역전적인 상황이 일어납니다. 쫓겨났던 그들이 주빈으로 식탁에 초대받아 앉았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 15절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 말씀에 주목했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신분, 외모, 직업, 소유 등으로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은 ‘하나님의 나라’의 상징이며 모형이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밥상을 통해서, 아니 먹는 것, 밥을 통해서 그들을 치유하시고, 위로하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즘 참 밥 한번 같이 먹기 힘든 시기입니다. 종종 전화를 통해서 안부를 전하면서 “다음에는 꼭 만나서, 밥 한번 같이 먹자”라는 것이 인사치레의 공치사가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식사를 통해 함께 할 수 있는 이를 주신 것에 감사하며 삶에서 작은 예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인으로 설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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