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최초의 미국 선교사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꼽는다. 그러나 이 땅에 첫발을 딛은 파송 선교사는 북미 장로교의 알렌(H.N. Allen)이었다. 알렌은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보다 반년쯤 먼저 서울에 도착했지만 공식적인 신분은 영국과 미국 및 서양공사관의 부속 의사였다. 그것은 신학과 의학을 공부한 그가 이땅의 권력자들이 기독교 선교를 용납하지 않으므로 취한 조처였다.

▨… 갑신정변에서 자상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은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은 알렌의 치료로 구사일생의 목숨을 건졌다. 그 공로를 인정받은 알렌은 왕실부시의관으로 임명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양의학의 치료술과 힘을 눈으로 확인한 고종황제는 1885년 4월 광혜원이라는 서양식 병원을 설립하도록 윤허하였다. 광혜원은 당시의 서민 치료기관인 혜민서와 활인서를 대신하는 근대식 병원이자 의료교육기관이었다.

▨… 광혜원의 발전에는 의료선교사 에비슨(O.R. Avison)의 헌신이 큰 밑받침이 되었다. 동시에 크리스천 기업가였던 세브란스(Luis H. Severance)와 그 가족의 헌신과 물질적 도움이 광혜원을 세브란스로 바꾸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미국 오하이오 주의 한 실업가였던 세브란스는 1913년에 소천했지만 서울의 세브란스병원을 계속해서 돕도록 유언을 남겼다. 이 유지를 가족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아래서도 지켜냈다.

▨… 교회사학자 민경배에 의하면 “알렌으로 해서 미국인에 대한 인상이 우호적이 된 것은 두말할 것 없고 미국 선교사의 선교에도 밝은 전망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민경배.『한국기독교회사』)고 한다. 당시 이땅의 가톨릭교회가 순교로 억압당한 반면, 프로테스탄트는 교육과 의료사업 병행의 방향 설정에 과감했기 때문에 선교의 첫발은 가톨릭보다 뒤졌지만 한국사회와 문화를 이끌 수 있는 힘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 우리 교단 임원회는 총회장단, 해선위, 국선위 연석회의를 통해 르완다 테바병원 이사회를 구성키로 했다고 한다. 아마도 르완다에 세브란스병원과 같은 의료선교용 병원을 세우려는 의도로 읽힌다. 결과는 두고 보아야겠지만 선교의 장기적 대책을 마련하려는 방향으로 이해되어 우선은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그 험한 길에 동행할 인력과 그 끝을 알지 못하는 수렁에 부어야 할 재력을 우리 교단이 감당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다된 밥에 재뿌리는 것일까, 걱정도 팔자일까. 총회장단의 의중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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