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배신과 리더십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 먼저 들을래?” “아무렴 어때, 아무거나”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신대” “그래 그럼 나쁜 소식은 뭐야?”

해학이 넘치는 대화로 들리십니까? ‘부정성 효과’로 보이십니까? 나쁜 소식을 듣고 더 나쁜 소식, 부정적인 생각에 지배받는 것을 ‘부정성 효과’라고 하는데요. 의사가 암 환자에게 수술 후 죽을 확률이 10%가 된다고만 말할 경우와 살 확률이 90%가 된다고 말할 때 전자가 수술을 덜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부정성을 모조리 제거하고 긍정성으로만 무장하는 게 성서적일까요? 간과했던 긍정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들추어내고 긍정적 사고가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지를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는 「긍정의 배신」을 통해 고발합니다.

저자는 유방암 선고를 받고 인생 최대 위기를 맞이했는데요. 현대사회에 만연한 긍정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맞닥뜨립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위로의 말을 건네는 가족, “암은 내게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멋진 일이었다”라는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의 어이없는 고백, 부정적인 생각이 원인이었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암 환자를 만납니다.

닥친 현실에 냉정해지고 싶었지만 긍정주의에 감염된 세상은 현실을 직시하려는 그녀를 아예 차단합니다.

저자는 시련과 실패를 당할 때 원인과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기보다 모든 일의 발화가 자신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라고 믿게 만드는 긍정 이데올로기의 횡포를 추적합니다.

“긍정은 위기의 징후에 눈 감게 만들어 금융위기와 사회적 재앙에 대비하는 힘을 약화하고 실패의 책임을 개인의 긍정성 부족으로 돌림으로써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변호한다.”라고 역설했습니다.

『생각하라! 그러면 부자가 되리라』,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긍정의 힘』,『시크릿』등은 긍정을 노래합니다.

그럴듯한 사례도 제시하는데요. 긍정을 파는 책이 약 3년을 주기로 베스트셀러가 된답니다.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은 긍정심리학의 선구자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의식적으로 낙천적이어야 한다”라며 긍정적인 마음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긍정심리학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그게 전부일까요. 의문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행복한 삶은 선택일까요?”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의『불가능은 없다』는 한국교회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1956년 500 달러로 캘리포니아 가든그로브에 세운 수정교회는 초고속 부흥을 했지만 2010년에 파산했습니다.

‘번영신학’의 대가, ‘긍정의 힘’의 원조격인 로버트 슐러 목사가 세운 수정교회가 부도날 때 한국교회도 적잖은 충격이었죠.

국내 많은 목회자가 성지처럼 순례하고 “교회를 기업으로, 선교를 비즈니스로, 신자를 고객으로”라는 슐러 목사의 경영철학을 다투어 도입하며 ‘번영신학’의 벤치마킹이 붐을 이뤘습니다.

목회 프로그램, 설교 스타일, 예배당 인테리어까지 모방했던 터라 실망이 부정, 부정이 절망이 됐습니다. 파산의 결정적인 이유로는 잘못된 리더십 교체로 인한 갈등과 장기 불황으로 인한 재정 문제를 듭니다.

긍정의 신학은 오랜 절망에 노출된 사람에게 희망을 줍니다. 하지만 지나치고 무분별한 긍정주의가 영성을 아둔하게 만드는 위험은 간과했는데요.

긍정의 신학은 인간의 탐욕을 죄로 보지 않고 장려했지요. 세계 금융위기를 초래한 보이지 않는 공범이었습니다.

세계는 지금 감당하기 어려운 긍정의 배신을 맞았는지도 모릅니다. 긍정주의 설교가 그려주는 장밋빛 미래에 취해 현실에서 멀어진 자를 구원해야 합니다. 긍정은 하나님과의 친밀감, 칭의, 공의, 정의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 진다”라는 끌어당김의 법칙은 짝퉁 복음입니다. 긍정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주님의 뜻, 마음, 방법과 타이밍입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말씀을 주문처럼 반복한다고 모든 것이 원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게 먼저입니다.

긍정의 자리에 내어준 죄와 사망,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합니다. 그 무엇도 십자가의 복음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부정성을 두둔하고 부정적인 리더가 되자는 게 아니에요. 막연한 긍정에 빠져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발을 딛고 일상에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긍정만으로 담아낼 수 없습니다.

대책 없는 긍정에 사로잡힌 이상주의자가 아닌 균형 잡힌 하나님의 사람됨을 생각할 때입니다.

긍정의 배신과 부정의 독화살을 피하고 말씀이 삶이 되는 일상을 살아야 할 텐데요. 교회는 기업이 아니고 주님의 몸입니다. 선교는 비즈니스가 아니고 사명입니다. 신자는 고객이 아니고 교회입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