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보다 우선시 하는 것들

예수님은 비유를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어느 날 “...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고 하시며 ‘장차 누가 어린 양 혼인 잔치에서 음식을 먹을지’에 관한 내용을 비유로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한 유대인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두 번 초청을 했습니다.

첫 번째 초청은 사람들에게 잔치가 열릴 것이라는 고지를 위함이었고(눅 14:16), 두 번째는 잔치가 준비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17절).

여기에서 주인이 보낸 ‘종’이 단수형태 (‘δοῦλον’, 눅 14:17)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종’은 단순히 하인이 아닌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 비유는 ‘생업’보다는 ‘교회 일’에 더 전념해야 하나님 나라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할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주안점은 하나님 잔치에 가지 않고 생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책망하는 말씀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보다 ‘소유에 대한 관심’이 더 지대했던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밭을 샀다고 해서 그 밭이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았고, 소를 사기 전에 이미 소의 건강상태를 테스트 했을텐데 초청에 응하기 보다 그 시간에 소를 테스트 하러 가겠다고 합니다.

또한 장가드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장가들었’기 때문에 잔치에 가지 않겠다고 한 말은 우리로 하여금 아담과 하와의 관계에서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롬 5:19)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한 대상은 하나님이었으며, 그의 순종은 아내의 말이었습니다. (창 3:6) “...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권위와 말씀에 복종하지 않고, 아내의 말을 중요시 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평안을 유지하며 화평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가정에도 주인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우선시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아내가 아담에게 “여보 이 선악과를 한 번 먹어봐. 선악을 알게 되어 하나님처럼 될거야”라고 하였을 때 아담은 하와의 말에 귀 기울이기 보다 아내에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시오. 당신은 하나님이 따 먹지 말라고 한 명령을 어긴 것이오!”라고 정색하며 아내의 잘못을 말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하와의 말을 따라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비록 눈에 띄거나 분명하지는 않아도 씨를 뿌리면 반드시 거두는 것처럼 불순종의 여파는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불순종의 댓가는 얼마나 혹독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의 길을 걸었던 가인의 결국은 아벨을 살인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잔치 초청 비유에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다 일치하게 사양...’(눅 14:18)하였다고 하였는데 ‘사양’이라고 번역한 ‘파라이테이사이’라는 말은 (어떤 중요한 일로 인해) ‘옆에 제껴 두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즉 세 부류의 사람들 모두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로 인해 잔치 자리의 ‘초청’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관점에서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삶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불순종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는 불순종으로 인해 문 앞에 죄가 엎드려 있게 하였습니다(창 4:7). 결국 그는 동생을 살해하는 것으로 불순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불순종의 유혹에 미혹당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논리와 지혜를 따라가는 삶을 영의 눈으로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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