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성탄절이 되면 동방박사 이야기는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읽히는 내용입니다. 물론 우리는 동방박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하늘의 별을 연구하여 신의 뜻을 알아내는 자들로서 큰 인물이 출현할 때는 특별한 별이 나타난다고 믿으며 항상 별을 눈여겨 관찰하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혹자는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로부터 메시아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그 별을 기다려 온 이방인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여간 어느 날 그들은 별을 연구하다가 서방의 먼 유대 땅으로 별을 따라서 온 것입니다.

에스라와 함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이 넉 달 정도 걸린 것을 고려할 때(라 7:9), 별을 관찰하기 위해 밤만을 이용해서 이동해야 했던 동방 박사들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족히 넉 달 이상은 걸렸을 것입니다.

동방박사 이동 경로

물론 그들의 이동 경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이스라엘의 길이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 경로 추적은 가능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리고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헤롯에게 기록된 선지자의 말을 전한 후, 돌아올 때는 그 메시아가 어디에서 탄생하셨는지를 알려 주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황금과 유향(乳香)과 몰약(沒藥)을 가지고 남쪽 방향으로 15km에 위치한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을 보며 기뻐하며 경배한 그들은 예수님께 예물을 바치고 돌아가기 바로 전날 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들이 왔던 방향의 반대쪽으로 내려가는 길뿐이었습니다.

혹자는 예루살렘을 거치지 말고, 베들레헴에서 직접 여리고로 가면 되지 않느냐며 반문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광야는 정상적으로 나 있는 길이 아닌 경우 작은 캐년 같은 것이 있어서 그곳에 형성된 깊은 골짜기로 인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져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여리고와 베들레헴 사이에는 작은 캐년이 곳곳에 있어서 예루살렘을 거치지 않고는 여리고에 가는 길은 사실상 없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다시 북상하여 예루살렘을 거쳐 여리고를 통해 자기 집으로 가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었습니다.

다른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길을 택하라고 한다면 북쪽으로 진행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이 아니라, 그 반대쪽인 남쪽으로 진행하여 헤브론과 드고아를 거쳐 북쪽으로 올라가 엔게디를 거쳐 여리고를 통해 동방으로 가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그들이 정상적으로 가는 길보다 대략 5~6배 정도 멀리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광야 길을 조금이라도 걸어본 사람이라면 광야의 무서움에 몸서리 칠 것입니다.

광야에서 태양에 노출되면 15분도 채 안 되어 몸에 탈수 현상이 생기기 시작하여 얼마 가지 않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예루살렘을 거쳐 동방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상상을 하며 즐거움을 만끽하던 그날 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것입니다.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명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별을 좆아 메시야를 찾아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을 거쳐 광활한 사막 땅을 건너 온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은 메시아를 만나서 준비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이런 고생에 대한 대가가 보상은커녕, 생명을 걸고 ‘다른 길’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잘 납득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사치나 호화로움을 원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교통비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물, 음식, 숙소 등의 경비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온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가 목숨이라니요! 얼핏 생각하면 그리 복잡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미 왔던 길, 익숙한 길, 우리가 잘 아는 길로 되돌아가면 됩니다. 괜스레 순종한다고 생소하고 위험하고, 긴 여정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헤롯에게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주기만 하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두둑한 경비는 물론 그들에게 쏟아질 찬사와 환대도 기대할 만합니다.

더욱이 현재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다른 이가 아닌 헤롯 대왕이었습니다. 아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기를 찾거든 자신에게 알려주는 조건으로 동방박사들을 환대하며 보내주었습니다.

헤롯 대왕의 잔인함은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 만일 다른 길로 행하게 될 경우 배반자로 낙인찍혀 어떤 일을 당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 펼쳐질 것입니다.

지금과 같이 자동차로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낙타를 타고 천천히 이동해야 하는 낯선 외국인들을 헤롯의 빠른 군대가 찾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목숨 건 순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른 길을 택한 것은 “이제는 죽어도 괜찮다. 우리의 목적인 아기 예수를 경배했으니 이제 됐다”는 그들의 결의가 깔려 있어야 가능한 순종이었습니다.

헤롯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사가 지시한 대로 다른 길로 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진리 수행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오는 과정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이 명하신 ‘사명’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동방박사들의 순종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경험한 자는 애당초 처음부터 생명을 던질 각오를 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과정에 쓰임을 받은 절대적 협조자였던 동방박사는 죽음을 각오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말 그대로 ‘불이익적 선택’을 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전혀 고려함이 없이 저 무조건 예수님의 탄생에 협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Dirty is out of the place”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러움이란 자기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연못 속에서 커다란 고기가 헤엄칠 때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고기가 우리의 침대 위에 누워 있다면 우리는 더럽다고 말합니다.

아름답던 물고기가 혐오스러워지는 것은 그 물고기의 본질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논밭에서는 꼭 필요하고 고마운 흙이 방바닥에서는 닦아내야 할 대상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구원받은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 각자 주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사명’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구원을 얻고 첫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사명’은 주어집니다. 믿음이란 다른 말로 이 사명의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우직함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잠시 있다가 사라질 명예와 치사한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소인배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삶입니다. 이 말을 또 다른 말로 ‘그리스도를 본받음’ 또는 ‘그리스도를 따름’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삶의 뿌리는 수고와 고난과 희생입니다.

잔치를 할 때는 보통 돼지를 많이 잡습니다. 그 이유는 소는 밭을 갈아야 하며 개는 집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사명’과 함께 시작합니다. ‘사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왜 부르셨는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 믿으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한다면 어떤 면에서 볼 때 철딱서니 없는 말인 듯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죽을 고생을 해도 그 삶에 행복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다면 사용해봄 직한 말인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으면 “고생 끝! 행복 시작”입니다. 메시아를 만난 동방 박사, 그들은 고난받을 상황도 행복으로 여기고 죽음을 각오하고 다른 길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모함과 오해와 손해를 감수할 각오를 하며 살아가는, 헤롯과 같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과 맞선 이들이 바로 예수를 발견한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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