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에 가까운 추위에 남산을 산책하다보니 산모퉁이 양지바른 곳 덩굴로 얽혀 있는 개나리 줄기에 제법 여러 송이의 노오란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보기 드문 일이라 스마트 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이런, 철없는 것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사계절이 뚜렷한 환경의 바뀜을 여러 해 반복하여 경험하지 못했다면 ‘철모르는 것’(不知)일 수 있습니다.

철부지의 실수는 쉽게 용서받을 수 있고 철모르던 시절은 오히려 추억이며 그리움일 수 있습니다.

해의 바뀜을 여러 번 경험하면 ‘철’(季節)이 지식과 분별력으로 스며들게 되는 법인데, 아직도 분별없이 처신한다면 ‘철모르는 것’이 아니라 ‘철없는 것’이죠.

나이가 들고 나이테가 많아지고 경륜이 쌓이는데 그에 걸맞는 책임 의식이나 지혜가 부족하면 보는 이가 “저런, 철없는 것”하며 혀를 끌끌 찰 테지요.

사계절의 변화를 한 묶음 경험하면 한 살의 나이를 더해가는데 나이를 먹는 사람이 있고 나이가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이를 먹는다(食)는 말은 소비한다는 뜻입니다. 먹어 버린다는 말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하늘이 허락하여 내려준 세월의 길이와 양(量)이 있습니다. 한 해를 살아, 한 살을 먹는다는 것은 정해진 양의 세월 가운데 그만큼을 소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 곳에서 전해 오는 정보, 안부, 기별 따위를 소식(消息)이라 하는데, 아마도 모든 인간사(人間事)가 목구멍을 드나드는 숨(息), 즉 목숨을 사라지게 하는(消) 것이라는 철학적 의미를 담은 표현이랄 수 있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라는 말이 소모적이고 허무한 느낌의 자조적(自嘲的) 표현이라면, 나이가 ‘든다’라는 말은 긍정적이고 생산적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유치하거나 경솔하지 않게 처신하면 의젓하다는 뜻으로 철이 들었다는 말을 씁니다. 푸르던 잎에 새로운 색깔이 보이면 단풍이 든다고 합니다. ‘나간다’의 반대 방향의 개념으로 들어 온다는 뜻입니다.

하는 일도 없이 나이만 먹었다는 말은 소모적인 인생을 살았다는 뜻으로 머리와 가슴에 들어있는 것이 없고, 이룬 것도 없이 세월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이란 말은 나잇값을 좀 하라는 책임감의 표현입니다.

공자는 그의 삶에 있어서 두 가지 큰 기쁨(說. 樂) 즉, 배우고 익히는 일(學而時習之 不亦說乎)과 먼 곳으로부터 벗이 찾아옴(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을 말한 일이 있습니다.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이 어떻게 성숙해 왔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고(志學), 30세에 배운 일에 대하여 뚜렷한 식견을 가져 서게 되었고(立), 40세에 무슨 일에든지 사리를 알게 되어 남의 말이나 자기 의심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며(不惑), 50세에 하늘이 준 사명을 알게 되었으며(知天命), 60세에 귀로 들어오는 소리가 마음에 통하여 거스름 없어(耳順) 생각하지 않아도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알게 되고, 70세가 되니 마음에 하고자 하는 대로 다 하여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從心所欲 不逾矩)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에게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 동틀 녘에 당신의 사랑으로 한껏 배불러 평생토록 기뻐 뛰며 노래하게 하소서. 우리가 고생한 그 날수만큼, 어려움을 당한 햇수만큼 즐거움을 누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시90:10~15)

세월이 갈수록 깨닫고 헤아리며 소망을 가질 수 있다면, 그는 나이를 ‘먹지 않고’,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이를 얼마나 먹었습니까? 아니면 얼마나 나이가 들었습니까? 철모르던 시절은 지났으니 철 좀 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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