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와 절제와 심판’의 함의는?

        홍성철 박사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의 고발로 졸지에 갇힌 몸이 되었다. 그는 유대의 총독인 벨릭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 재판관은 돈과 성을 탐닉하는 악명 높은 인간이었다.

그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남의 아내였던 미모의 드루실라를 유혹하여 세 번째 아내로 삼을 정도였다. 

벨릭스는 아내와 함께 바울을 불러내어 그리스도 예수의 도에 대해 질문하면서, 두 사람은 대면하게 되었다.

한 사람은 정치가였고, 한 사람은 전도자였다. 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타락했으나, 한 사람은 깨끗했다.

한 사람은 돈을 좋아했고, 한 사람은 청빈했다. 한 사람은 재판관이었고, 한 사람은 피고인이었다. 한 사람은 ‘두려워했고,’ 한 사람은 담대했다. 

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총독에게 바울 사도는 ‘의와 절제와 오는 심판을 강론했다.’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는가?

첫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종, 곧 그분에게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의 눈치나 보면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소신을 밝힌 적이 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0).   

둘째 이유는 벨릭스가 당장은 재판관이지만, 어느 날 그도 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지옥으로 던져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바울 사도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복음을 전했다. 그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한 간증을 들어보자.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행 20:26-27).   

셋째 이유는 세상의 권력은 바람과 같이 빨리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바울 사도도 벨릭스 총독에게 ‘의와 절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의’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공의이고 또 하나는 칭의이다. 바울 사도는 두 가지 뜻을 다 풀어주었을 것이다.

벨릭스가 공의롭게 재판해야 한다는 것도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도자인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려주었을 것이다. 

재판을 받는 피고인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재판관에게 ‘절제’를 강론하다니, 인간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바울 사도는 죄인인 벨릭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여야 성령으로 거듭나서 절제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려주었을 것이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갈 5:23).   

‘오는 심판’은 죽음과 더불어 모든 인간을 찾아오는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도 알려주었을 것이다. 바울 사도가 ‘강론했다’는 것은 상세히 설명해주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죄인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가라도 심판을 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못에 던져져서 영원히 지내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었을 것이다 (계 21:8). 

바울 사도가 이런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강론할 때 성령이 임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피고인 앞에서 재판관인 벨릭스가 두려워했을 이유가 없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행 24:25). 

‘의와 절제와 심판’에서 ‘의’는 의롭게 되는 과거의 경험을 함축하고, ‘절제’는 현재의 삶을 강조하며, ‘심판’은 미래의 사건이다. 결국, 이 메시지는 인생 전체를 망라하는 복음의 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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