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체검사라는 치욕적인 시간이 다시 왔다. 그들이 뼈만 앙상한 다리와 굶주림으로 착 달라붙은 뱃가죽을 보면서 어떤 쾌감을 느끼는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또한 나는 옷을 완전히 벗기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벳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도 벗겼어.” 내 앞에서 조그맣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오 코리, 그런데도 나는 주님께 감사한 적이 없었구나…”(코리 텐 붐, 『주는 나의 피난처』)

▨…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하나님께 맡기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쳤던 코리 텐 붐(1892~1983)은 나치하의 네덜란드에서 유대인의 도피를 돕다가 아버지 캐스퍼, 언니 벳시와 함께 독일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 갇혔다. 혹독한 수용소 살이에 아버지와 언니는  생명을 잃었다. 종전 후 석방된 코리는 언니의 유지를 따라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한 용서운동을 펼쳤다.

▨… 그 용서운동의 일환으로 코리가 독일 뮌헨의 한 교회에서 간증을 마친 날 한 남자가 악수를 청했다. 그 사람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 악랄하기로 이름난, 사촌 언니를 강간하기도 했던 수용소 간수였다. “나는 그때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할 수 없지요”라고 생각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손을 내밀자 “주께서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부어주셨다.”

▨… 코리의 이 간증이 과장일까? 거짓일까? 나치 점령 이전 네덜란드에는  115,000명의 유대인이 살았었다. 종전 후 남은 유대인은 8,500명 뿐이었고 그 중 800명을 코리가족이 구해냈다. 이 일로 코리가족은 4명이 생명을 잃었다. 코리가족의 삶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이었음을 뉘라서 부정할 수 있으랴. 코리의 언니 벳시가 말했다. “감당하기 힘든 삶의 시련도 사랑이 따르면 아름답다.”

▨… 최근에 어느 교회가 “안 나온 지 10년이 넘어 제적됐다”고 밝히자 “예배에 비정기 출석했는데 교회가 이를 몰랐던 것 같다”는 해명이 뒤따랐다. 그러자 말에 말의 꼬리가 이어져 난장이 섰다. ‘가나안 성도’에서부터 신앙이 예배출석횟수로 가늠될 수 있느냐는 비아냥까지…그러나 코리의 신앙에 관한 한에서는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소속한 교회 이름이나 예배 참여횟수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일까. 그 삶이 그 신앙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은 소속교회 유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삶에 의해서 유무가 증언되고 있음을 코리는 밝혀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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