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위한 남편의 헌신적 내조

한국 최초의 여자 의사는 박 에스더이다. 그녀의 본명은 김점동이인데 영어를 곧잘 했던 덕분에 그녀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보구여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의료선교사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의 통역 겸 보조였는데 그녀는 언청이 수술을 본 후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녀의 신앙도 성장해 갔다. 하루는 평양개척 선교를 앞두고 로제타가 그녀에게 물었다. “예수님을 위해 평양에 가서 일할 생각이 있느냐?" 그녀의 대답은 이러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는 데는 어느 곳이라도 가겠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나를 죽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에 내 목숨을 내 놓겠습니다."

그녀는 16세 되던 1893년 5월에 결혼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결혼에 크게 뜻을 두지 않았다. 남자를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느질과 같은 가사일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16세가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있으니 사람들의 입에 크게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집안에서는 이런 수치를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굳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적당한 신랑감을 골라 시집보내려고 했다. 이때 홀 부인의 눈에 띤 청년이 박유산이었다. 두 사람은 홀 부인의 소개로 결혼하게 되었다.

한편, 평양에서 개척 사역으로 분주하던 닥터 홀이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다. 홀은 아내에게 “내가 평양에 갔던 것을 원망하지 마시오. 나는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이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소"라는 말을 남기고 주의 품에 안겼다. 당시 홀 부인에게는 한살 된 아들과 임신 7개월 된 태아가 있었다.

남편의 장례식을 마친 후, 홀 부인은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때 홀 부인은 에스더의 요청으로 그 부부를 함께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에스더에게 의학공부의 기회를 열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1895년 2월이 되자, 에스더는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했고, 남편 박유산은 셔우드 가의 농장 일을 돕게 되었다. 미국의 교과과정은 한국과 너무 달라서 에스더는 매달 과외비용을 지불하며 따로 공부해야 했다. 그 결과 에스더의 성적은 많은 진전을 보였고, 마침내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1896.10.1).

이제 에스더는 정식으로 서양의학을 공부한 최초의 한국인 여성이 된 것이다. 이런 영광의 배후에는 남편 박유산의 눈물 나게 아름다운 헌신이 있었다. 에스더가 의과대학에 다니는 동안 남편 박유산은 식당에서 일하며 그녀가 학업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런데 남편 박유산이 그만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온갖 일을 했던 탓에 건강이 나빠졌던 것이다. 결국 박유산은 회복되지 못하고 아내의 졸업을 목전에 두고 이국땅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아내를 위해 더 크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이다.

남편의 성공을 위한 아내의 눈물겨운 내조 이야기는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 하지만 아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남편의 이야기는 흔하지 않다. 더구나 그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비록 이국땅에서 행해진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혁명적 변화'였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 아닐까. 신분, 성별, 소유, 연령 등의 차별을 떠나 서로를 위해 썩어지는 밀알이 되고자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

최근 한국의 많은 가정들이 해체되고 있다. 함께 행복 마차를 타고 가던 부부들이 비탈을 만나 서로를 껴안기보다 밀쳐내면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크리스천 가정들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제 복음 앞에서 남녀와 빈부의 벽을 허무는 ‘소리 없는 혁명’을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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