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눈앞에 두고 있는 11월에는 특별히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한 해 동안 수고하여 거두어들인 풍성한 곡식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이 있다. 이 추수감사절은 성탄절·부활절과 함께 기독교의 중요한 절기다.

추수감사절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한 절기는 아니지만, ‘감사’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이자 덕목이기에 한 해를 보내면서 교회 공동체가 함께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다.

더구나 성경 속 유대인이 지켰던 유월절과 맥추절, 초막절은 모두 ‘감사’에 대한 절기이기도 하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3대 감사의 제사를 지켰다. 그것은 출애굽을 기억하여 드리는 감사 예배인 유월절과 둘째는 맥추절(오순절 혹은 칠칠절), 그리고 셋째는 초막절(수장절)이었다. 초막절은 출애굽 당시의 초막 생활을 기념하며 수확한 예물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드리는 예식으로 추수감사절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추수감사절은 널리 알려졌듯 미국에서 시작됐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잉글랜드 지역에 도착해 플리머드란 부락을 세우고 농사를 지어 거두어들인 첫 수확물을, 1691년 가을 주변의 원주민들을 초대하여 식사하며 수확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올린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추수감사절은 풍성한 결실로 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과 고백을 돌리는 날이다. 신대륙의 거친 땅을 제대로 된 연장이나 도구 없이 경작하여 거둬들인 첫 소산을 놓고, 청교도들은 얼마나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을까. 우직하게 땀 흘려 일하고 그 예물을 먼저 하나님께 봉헌했던, 진실하고 가난한 마음의 청교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미국이 있는 것이다.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나라는 그래서 초기부터 추수감사절을 지켜왔다.

그러나 현대로 올수록 점차 그 의미와 중요성이 퇴색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과거 너무나도 빈곤하고 굶주리던 시절에 믿음의 열조들이 추수감사절을 맞으며 느꼈던 감격과 감사는 찾기 어렵다.

많은 교인들이 이를 형식적으로 지키거나, 일부는 그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또 현대사회로 오면서 농사에 종사하는 이들이 줄어들면서 이 같은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점은 우리 한국사회,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점차 ‘감사’의 의미 또한 퇴색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지금은 여러 모로 감사하기 어려운 때이다. 코로나19 사태는 끝이 보이지 않고, 이로 인해 사회 전반으로 퍼진 침체와 갈등과 절망은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를 통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각종 강력범죄와 자살 등의 문제들은 점차 그 도를 더해가고 있으며, 미래의 꿈나무인 청소년·청년들도 불건전한 문화에 젖어들고 있다.

이제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사회 갈등과 분열은 더욱 극심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조건들을 모두 따져서야 어찌 감사할 수 있겠으며, 또 감사할 만한 때만 감사하는 것이 어찌 그리스도인의 감사라 하겠는가. 그 모든 상황과 조건을 초월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야말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성도의 감사이다.

성도의 감사는 역사를 낳는다. 아브라함으로 시작해 수많은 믿음의 열조들과 신앙의 선배들이, 절망 가운데 오히려 감사함으로 역사를 일으켰다. 이제 1년을 거의 보낸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감사의 제사를 올릴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을 축복하시고 차고 넘치는 은혜로 덮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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