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절 한국교회가 부흥 성장할 당시 성도는 목회자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에 순종했습니다. 훌륭하신 목사님 한 분의 리더십만으로도 교회가 충분히 성장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오늘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입니다. 저는 이 섬김의 리더십의 모형을 2천 년 전 당시 바울을 통해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여러 교회로부터 모금한 돈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하려는 소식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간다”라고 말입니다.

지금이야 교회를 후원하는 일이 온라인 계좌만 있으면 쉽게 해결됩니다. 하지만 교통수단도, 은행도, 인터넷도 없이 오직 인편으로 소식을 주고받는 당시 상황에서 구제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바울의 모습은 힘든 여정이기에 애잔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이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예수 신앙을 지키던 유대인들은 참으로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특히 계속된 흉년은 그들을 더욱 괴롭혔고, 박해로 숨어 지내다 보니 굶주림은 그들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비록 이방지역에서 대부분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엔 항상 동포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들을 읽어보면 예루살렘 교인들은 바울을 별로 반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가슴속 깊이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자신은 장막 만드는 일을 감당하며 때로는 배를 곯아가며 선교했고, 교회에다 자신의 생활비를 달라고 손을 내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가난한 동포들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모금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바울서신에도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목회자나 선교사가 헌금 얘기하는 것을 좋아할 교인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오히려 이 헌금이 구제와 주의 사업을 위해 바르게 사용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 2:10)  

고린도전서 16장에는 그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하여 실천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고 매주 이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따로 모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렇게 헌금한 것을 바울은 ‘은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사역을 ‘성도를 섬기는 사역’이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섬김의 사역은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때론 말이나 구호로만 그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와 함께’라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겠지만 이 사역의 길에 올바른 방향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를 섬기는 사역’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교회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난받으면서도 묵묵히 교회를 출석하는 여러분들 앞에 인간적인 안타까움과 애잔함이 깃들지만, 저는 바울의 고백처럼 성도를 섬기러 가는 사역의 모습으로 코로나와 함께 달려가고 싶습니다. 이것이 마치 화려한 목회 속에 감추어진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섬기는 목회이기 때문입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