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전쟁의 발굽 아래 밟히고, 바람 앞에 촛불 같은 남은 한 조각의 땅. 인구 삼십만 도시 부산은 전국에서 몰려온 피난민들로 들끓었다.

갑자기 불어난 인구는 100만명에 이르러 마치 거대한 난민 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포성이 산하를 뒤흔드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백합화는 잠잠히 파란 싹을 틔우고 있었다.

1951년 10월 7일 미국에서 돌아온 고성부 노인이 20명의 어린이를 친절하게 자택으로 불러 모았다. 전쟁으로 배고픈 아이들은 옷차림마저 남루하지만, 천진난만한 그들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노인은 코흘리개 어린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 말씀을 전했다. 그의 자택에서 단을 쌓고 예배드림으로써 남천교회가 태동하였다.

빌립보 강가의 루디아 집을 통하여 첫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께서 남천 해안가 고성부 노인의 집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셨다.

보리밭으로 둘러싸인 해안가 어촌마을, 전시 중에도 원주민들은 피난민들과 더불어 화목하게 어울려 지냈다.

십자가가 없는 이 마을에 한 목자가 파송되었다. 그는 부산에서 임시 개교한 서울신학대학 졸업반 서병대 신학생으로 막 결혼한 신혼부부였다.

창립 초기에는 신앙의 열정을 가진 피난민 성도들이 교회 분위기를 이끌었다. 성도들은 어서 속히 성전을 달라고 부르짖었고, 태동한 지 육 개월 만에 성전 건축 기공 예배를 드렸다.

넉넉지 않은 재정으로 시작한 성전 건축은 도중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전도사와 사모가 목수가 되고 성도들과 어린이들까지 일꾼이 되어 연일 성전 건축에 매달렸다.

지붕 덮을 예산이 없어 유엔군이 쓰고 버린 다양한 색깔의 빈 깡통을 무수히 주워 모았다. 여러 날 동안 가위로 자르고 모루와 망치로 펴고, 다시 가위로 오리어 고기비늘같이 능직으로 붙여서 지붕을 덮었다.

땀과 눈물이 어린 거룩한 성전이 봉헌되었다. 건축 경과를 보고하는 집사님이 성령에 감동하여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자 참석한 성도들과 내빈들도 함께 벅찬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연말 첫 사무총회에서 어른 48명, 어린이 97명으로 보고했다. 어린이들의 획기적인 증가는 교회 일꾼들을 세우는데 필요한 원천이 되었다.

기독교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굴곡진 역사로 점철된 것처럼 남천교회도 같은 맥락의 길을 걸었다. 희년의 전반까지 11명의 담임 목자가 다녀갈 만큼 부흥과 침체의 고리로 엮어졌다.

그처럼 교세 부침의 아픔을 많이 겪었기에 다소곳이 이를 반추하고 반면교사로 삼아 분연히 일어섰다. 후반기부터 사명감에 불타는 목자와 성도들이 세 번째 성전을 건축하면서 비약적으로 교회가 부흥되고 안정을 찾았다.

단풍이 남기고 간 떨켜에서 움이 돋아나 푸른 생명이 번성한다. 형형한 기색도 힘찬 혈기도 사라져가는 고성부 노인이 미래를 꿈꾸는 어린이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간 발길은 아름답다.

남천교회는 창립 70주년을 맞이하여 교회학교 양육을 위하여 비전센터를 세우고, 필리핀 파이나 섬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심기 위하여 생명나무학교를 건축 중이다.

코로나19 전쟁이 우리의 신앙 사역을 가로막고 있지만, 이런 힘든 역경 속에서도 노인의 신앙을 본받아 어린 생명 하나라도 예수님을 영접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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