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라이 제로 공동체

직장인과 상담을 했는데요. 직장 내 또라이 때문에 몸과 마음이 많이 상했더군요.

또라이는 업무시간에는 대충이면서 야근은 대략 주 3일, 뒤풀이를 명분으로 술 파티까지 한답니다. 내담자는 야근을 안 하려고 집중도 높게 일하고 퇴근 후엔 운동과 자기 계발을 해왔는데 어느 날 왕따가 됐더랍니다. 그들만의 단톡방도 있고요.

앞쪽에 앉은 직원은 열등감과 피해의식의 갑옷을 입고 미친 사람처럼 종일 중얼거린다네요. 셀 수 없이 ‘식빵’을 남발하며 말이에요. 자리라도 옮겨 달라 요청했지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라는데 인내가 바닥을 드러내고 마음의 병이 생겼답니다.

직장 내 따돌림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사안은 공식적으로 처리가 가능하겠지만 평생을 고발자로 살고 싶지 않답니다. 어떻게 도와줘야 할까요? 공정하고 확실한 처방이 있다고 한들 최고의 답이 될까요?  

그냥 듣기만 했어요. 지금까지 참은 게 대단하다고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경영학 교수 로버트서튼은 논문 한 편을 제법 보수적인 잡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보냈는데요. 제목은 ‘또라이 금지 규칙’이었습니다.

비속어 ‘또라이’(asshole)가 여덟 번이나 들어갔지만 그대로 실렸습니다.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자 연구를 넓혀 책으로 냈고 「또라이 제로 조직 The No Asshole Rule」은 조직에서 동료·상사·부하의 영혼을 갉아먹는 비열한 인간에 대한 경영학적·조직심리학적 보고서이자 ‘또라이 없는 세상’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았습니다.

저자가 밝히는 ‘또라이’의 일반적인 행동 양식은 인신공격, 개인 고유의 영역 침범, 함부로 하는 신체 접촉, 말 또는 몸짓과 행동으로 위협하고 협박하기, 기분 나쁜 전자우편 보내기, 사회적 신분 모욕하기 등입니다.

‘또라이’는 ‘일시적 또라이’와 ‘공인된 또라이’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요. 보통 사람도 다양한 압박 상황에서 ‘또라이짓’을 할 수 있지만 문제는 ‘공인된 또라이’입니다.

누군가를 모욕, 무시, 차별, 냉소로 기분 상하게 하는 일을 반복한다면 ‘공인된 또라이’인 거예요. ‘위에는 알랑대고 아랫사람은 쥐어박는 인물’이 ‘또라이 중 또라이’입니다.

‘공인된 또라이’가 유능할수록 큰 피해를 낳는데요. ‘또라이 이너서클’을 만들어 무례를 일삼거나 공동체의 에너지를 고갈 시켜 사망의 골짜기로 밀어 넣습니다.

신대원 시절, 교단 내 졸업 후 사역을 피해야 할 다섯 교회, ‘오적 교회’가 있었습니다. 주일 사역을 마치고 기숙사에서 모이면 라면 몇 개를 끓여놓고 ‘또라이 리더’에게 당한 푸념을 늘어놓을 때가 일주일 중 가장 진정한 치유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적어도 ‘또라이 담임목사’는 되지 말자고 그토록 다짐했는데 또라이짓에 대한 몇 번의 기억이 생생한 걸 보니 기억에 없고 느끼지 못한 또라이 짓은 더 많을 것입니다.

지나쳤던 과거가 갑자기 끔찍해져 아내에게 토설했더니 깨달은 게 은혜라고 하네요.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들어보셨죠. 또라이가 없는 공동체는 없지만 또라이로부터 비롯된 정서적 전염과 영적인 피해는 줄일 수 있습니다.

처방전은 주님이 주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공동체의 개와 돼지가 누군지 분별해야 합니다.

사회 조직이면 시스템을 가동해서 또라이를 버스에서 내리게 하면 그만이지만 주님의 교회는 그를 품고 기도하며 회복을 도와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 그에게 임하셔서 변화시킬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최선을 다했는데 변하지 않으면 주님이 그를 옮기십니다. 섬기고 돌보는 때에도 거리를 둬야 합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지 않으면 그의 증상이 더 악화하고 내가 또라이가 되기 십상입니다.

공동체에서 또라이가 떠나려 할 때 강력하게 만류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게 사랑이고 능력인 줄 알았는데요. 그가 남아서 쏜 두 번째 화살은 최신 무기였어요. 한 발인데 목표물 앞에서 다발성 화살로 변신하더니 예닐곱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그가 떠난다면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의 수고를 다 하면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영적인 에너지를 떠난 자를 생각하며 후회하고 변호하는 데 쓰지 말아야 합니다. 남은 자를 향한 섬김과 돌봄의 책임을 다한다면 또라이 제로 공동체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선 겁니다. 또라이를 피할 수는 없어도 공동체가 입을 피해는 줄여야 합니다.

또라이를 막을 수는 없어도 내가 또라이가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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