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슬픔’이란 제목이 붙어 있는 얼굴 조각상이 있다. 슬픔이라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분위기를 드러내주는 단어와 그리스도라는 믿음의 세계를 열어주는 단어의 결합이 자연스러울 수 있는가의 질문은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금발의 긴 머리에 연민이 가득한 파아란 눈의 예수님 초상을 늘 대해오던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기괴하다는 느낌이 들게 할 수도 있는 조각상이다.

▨… 그 조각상의 눈은 이마 가까이에 툭불거져 왕방울 같고 코는 얼굴을 둘로 나누려는 역할을 맡은 것처럼 길게 늘어져 있고 입은 작품의 마감손질을 제대로 못한 것처럼 거칠게 표현되어 이 조각상에서 예수님의 초상을 발견하려는 사람은 열에 아홉은 실패를 겪게 된다. 오히려 그 조각상의 얼굴에 예수께서 슬퍼하시는 인간의 아픔, 괴로움, 연약함을 담으려 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바른 이해일 수도 있을 지경으로…

▨… 어느 일본인이 그 조각상의 작가인 파니커(K.C.S Paniker,인도인)에게 그 작품을 만들게 된 동기를 물었다. “나는 힌두교인입니다. 나는 마드라스 기독교대학에 다닐 때 성경을 읽은 적이 있는데, 예수가 문둥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같은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 속에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알고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감명이 동기였음을 파니커는 밝혔다.

▨… 이 여름 우리 성결인들은, 성결인 지도자들의 자신의 옳음을 끝까지 관철시키려는 이기심, 자신의 주장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집요함을 목도했다. 실정법(사회법)이 어떤 판결을 내리든, 그 결과로 총무의 직무가 정지되든, 직무정지가 해제되든, 성결인 목사사회의 품위는 볼품없이 곤두박질쳐버렸음을 뉘라서 부정할 수 있는지를 묻고 싶다. ‘그리스도의 슬픔’을 기억해 성결인 목사사회의 품위를 이제부터라도 살리려 안간힘을 쓰는 성결인은 정말 없는가.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성서의 증언은 사람이 하나님과 한몸을 이루고 있고 따라서 피조물(사람) 안에 창조주(하나님)가 현존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특별한 위치에 있음을 밝히는 표현도 그와 같은 관계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하자. 우리 성결인 목사 지도자들 안에 하나님께서 과연 현존하시는가. 그 답이 그리스도의 슬픔의 원인이 아니기를 바라는 성결인들의 소망을 헤아려 주시도록 우리의 지도자들께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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