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울 지경으로 세상이 빨리 바뀌고 있다. 불난 곳에 기름 붓듯이 코로나19가 도져 변화의 속도를 더욱 당기고 있다. 거기에 21세기 들어 세계의 산업구조도 가파르게 재편되는 중이다.

미래학자들은 입을 다투어 이를 4차산업혁명이니 뭐니 하며 꼬리표를 붙이고 있다. 여기에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기존 정통 미디어 매체)의 틈새를 비집고 유튜브로 대표되는 1인 미디어 시대가 활짝 열렸다.

이런 21세기 초반 지구적 규모의 변화는 일찍이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할 정도의 속도이자 규모라 할 수 있다.

세상이 변하면 교회도 변할 수밖에 없다. 물론 교회의 본질은 변하거나 뒤틀어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세상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는 바뀔 수밖에 없다.

가시적 교회는 세상 안에 있고, 동시대인과 소통하며 복음을 전해야 할 소명적 책무를 지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변화에 예민해야 한다. 안테나를 세우고, 눈과 귀를 활짝 열어서 세상이 왜 변하고 있고, 그 흐름이 지향하는 곳은 어디고, 또 변화가 놓치고 있는 부분은 어떤 것인지 냉철히 분석하고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얻어낸 결과를 바탕으로 교회는 세상을 향한 올곧은 케리그마를 잘 포장된 형식에 담아 전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세상 변화의 고갱이는 무엇일까? 4차산업혁명, 블록체인, 빅데이타, 인공지능, 안드로이드 인공지능 로봇, 사물인터넷(IoT), 3D 프린터, 홈오토메이션(H.A.), 메타버스(Metaverse) 등, 지금 우리 시대 변화를 알리는 수많은 용어가 있다.

이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공유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발달한 통신 기술에 기반하여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이 가능한 초연결사회에 우리가 들어와 있다는 것과, 이는 곧바로 극단적 개인주의를 열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자, 이전에 TV나 음악, 그리고 영화 감상 같은 것은 공동체적으로 행하는 의식이었다. 가족이 함께 거실에서 TV를 시청하고, 음악을 듣고, 많은 관객과 함께 오감으로 체험하는 것이 영화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게 홀로 가능한 사회가 되었다. 거실용 TV는 가끔씩 펼쳐지는 국제 경기나 있어야 가족용 기기가 된다.

그 말고는 각자 자기 방에서 자기 만의 스마트 기기로 다양한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소비한다.

혼자다! 누구도 옆에 있지 않고, 있을 필요도 없다. 심지어 옷도 신발도 3D프린터를 이용하면 나만의 것으로 치장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등장은 암기 잘하는 좋은 머리가 더는 이 사회에 높은 평가를 받지 않도록 만들고 있다.

계몽주의 등장 이래 지속적으로 인류의 칭송을 받아오던 좋은 머리는 이제 인공지능의 몫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앞으로의 세상은 머리만 써서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극단적 개인화의 흐름은 코로나19가 더 앞당겨 버렸다. 모일 수 없게 만들었으니 사람들은 안전한 자신의 공간에서 무언가를 도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극단적으로 개인화된 사회, 탈이성중심적 사회에서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또 무엇으로 복음의 본질을 담아낼 수 있을까?

이런 시대 교회의 역할은 이전에는 간과했던 몸의 강조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애초부터 믿음이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우리의 전인적 대응이 아니었던가.

예배당 장의자에 앉아있으면 끝이 아닌, 우리의 전인적 행위를 요청하는 신앙생활로 혁신적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각종 예배, 성경공부, 특별활동 등등에서 온 맘과 몸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만끽하는 경험이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개인화된 동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with God) 전인적 신앙의 참맛을 전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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