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태생과 가문, 학문, 그리고 율법적 의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렇게 자랑으로 삼던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다.

바울의 고백은 진실하고 과감하다. 우리는 바울이 신뢰했던 것들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변했는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는 그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7절) 어떤 이들은 부모의 배경도 능력이라고 말한다.

능력 있는 부모를 둔 것, 돈 많은 부모를 둔 것이 내 잘못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시대의 소위 ‘수저론’은 그런 말들을 뒷받침한다. 태어나는 순간 그 출발부터 다르다. 바울도 그런 사람이었고, 그것은 자신에게 언제나 유익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삶의 터닝 포인트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셨다. 바울은 “몇 가지는 그래도 괜찮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 해로 여기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이 신뢰할만한 것들이 하나님보다, 그리스도보다 앞섰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목회자인 제러마이어 버로스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다고 해서 염려하지 않는다.

그들이 행복한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그들도 원하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또한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이다”(38p, 그리스도인의 귀한 보물 만족)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 바울처럼 그리스도 외에 더 소중한 것을 두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나도 미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고상한 지식인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고, 또한 예수님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음으로 바울은 그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이다. ‘바리새’는 헬라어로 ‘파리사이오스’(Farisai'o")이다.

이 말은 ‘구별하다, 분리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파라쉬’(vr;P;)를 음역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배설물’은 히브리어로 ‘페레쉬’(vr,P,)이다.

바로 파라쉬에서 모음만 바뀐 것이다. 본래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으니 모음을 빼면 글자는 똑같다. 그러니 바울은 자신의 파라쉬가 페레쉬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의 몸에서 분리되어 밖으로 나오는 것이 배설물이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것을 자랑으로 삼던 지난날의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에 비하면 대소변 같은 배설물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축복에 비하면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명예, 물질, 권력은 아무것도 아니다.

배설물은 화장실에서 물을 내릴 때 내려가는 것이다. 그것을 아까워하는 사람은 없다. 바울의 관점에서 보면, 또한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주님의 나라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고, 그것만이 가장 존귀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9절) 고 말한다.

우리의 관점은 언제 어떻게 바뀌었는가? 우리가 목사, 장로, 권사, 그 외에 세상에서 얻은 어떤 직책을 말하기 전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만을 우선적으로, 가장 고상한 지식으로 삼는 것에 전부를 다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신앙과 삶과 사역의 관점의 변화를 증명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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