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자유론

정부의 방역지침은 반기독교 세계관과 과도한 방역에  정파적으로 휘둘리는 모양세다 교회가 예배와 공동체 활동에 대한 자유를 말하는 것은 사사로운 이익을 초월하는 것이다 리더에게 얼마만큼의 자유가 보장될까요?

리더가 행복할 권리와 구성원의 요구가 충돌을 일으킬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종교의 자유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 자유는 허용되나요?

예배를 통한 코로나19 확산이 우려된다는 것이 대한민국 정부가 예배의 자유를 제한하는 이유인데요. 설득과 동의는 차치하고 예배를 통한 유의미한 감염률 통계도 없이 과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밀어붙입니다.

당위성이 없어 개혁교회가 침묵하는 게 아니라 이단과 일부 교회가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인데요. 한 걸음 더 들어가자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교회 내 코로나19 감염으로부터 성도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예배의 자유를 제한하는 입장은 존 스튜어트 밀이「자유론」에서 말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때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주장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정부가 집회의 자유를 제한한 것은 자유론의 이 지점과 궤를 같이 하는데요. 하지만 타인을 위한 자유의 제약이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아야 하며, 그런 정부의 개입이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변질돼서는 안됩니다.

작금, 정부의 방역지침이 예배의 제한을 통해 야기하는 문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했고 공동체의 자유까지 침해한다는 겁니다.

반기독교 세계관과 과도한 방역에 정파적으로 휘둘리는 모양새입니다.

거리두기 4단계가 보름을 넘어선 어느 날 오후, 로고스교회가 운영하는 카페에 들어갔다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손님과 성도들 약 29명이 좌석을 채웠습니다.

1,000석짜리 본당에는 마스크를 쓴 채 19명, 40여 평 카페에는 마스크를 벗고 차를 마시는 29명중, 무엇이 더 위험하다는 건가요. 종교의 자유는 이런 상황에서 어디까지 주장할 수 있는 걸까요?

삶의 근본 가치를 고민하며 타인에 대한 배려가 참된 행복의 출발점인 것을 인정합니다. 지나친 방역조치로 인해 공동체의 행복까지 제한하는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밀을 소환하지만 교회가 예배와 공동체 활동에 대한 자유를 말하는 것은 사사로운 이익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밀은 영국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가 민주화를 위해 싸웠으니 정부 핵심 참모의 아버지쯤 되나요?

하원 의원이 된 후 여성, 노동자,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으니 소외계층의 친구로 생각되나요?

밀은 보수당을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집단”이라고 비판했죠. 그 시대는 그럴 만했어요. 대한민국 국민도 길을 잃었던 보수당에 혼쭐나게 선거의 매를 때렸지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야 할 이유는 진보와 보수는 항상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진보나 보수 할 것 없이 자기 노선과 신념이 옳다고 맹신하는 순간 회복 불가능한 길로 들어선 겁니다.

보수를 향했던 선거의 매가 진보를 향할 수 있습니다. 기다려도 님은 오지 않았습니다.

일산 기독교연합회장으로 임원회의를 소집하고 예배당 10퍼센트 20명 이내의 형평성과 문제점을 부드럽게 지적하고 ‘좌석의 10퍼센트’를 연합회의 이름으로 가결하고 시장에게 통보하려고 했습니다. 다음날 좌석의 10퍼센트로 정부가 양보를 했더군요. 

보수는 안정을 진보는 개혁, 보수는 성장을 진보는 분배를 말합니다. 진보와 보수는 국민의 행복을 보장한다지만 그들이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보수가 지닌 한계 때문에 진보, 진보가 지닌 한계 때문에 보수가 존재해야 함에도 상대 진영의 모순만 찾다가 둘 다 죽어갑니다.

보수, 진보의 편향성과 유아적 우월감은 목불인견입니다. 이참에 정치나 시작해 볼까 합니다.

예수 정치입니다. 진보와 보수를 십자가에 달림으로 담아내신 ‘예수 운동’입니다. 보수와 진보를 존중하고 하나로 보신 예수 운동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그래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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