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황 피오(Pius) 11세가 “또 하나의 그리스도”라고 불렀던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20대 후반이었다. 어느 날, 그는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 있었고 예배 인도자는 마태복음의 말씀을 읽고 있었다.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그날의 말씀에서 큰 영감을 받은 그는 외투도 구두도 벗어버리고 농부의 자루옷에 새끼줄을 동이고 아시시 사람들에게 외쳤다.

▨… 그의 외침으로 아시시의 사람들에게 큰 감동이 일어나 그중 몇 사람이 프란체스코를 따라나섰다. 프란체스코는 그들을 중심으로 ‘작은 형제회’를 창설했다.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이방인과 순례자로 살며 자기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삶을 추구하였다. 프란체스코와 그 제자들은 부유함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하는 13세기의 가톨릭교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예수의 무소유를 실천하려 하였다.(엄두섭, 「성 프란체스코의 영성」참조)

▨… 이 시대에서도 프란체스코의 신앙을 구현하려는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프란체스코회에 속한 수도사로서 가난이 신앙의 필요조건인가를 또, 오늘의 신앙인들은 맘몬을 섬기지 말라는 복음서의 명령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를 스스로 묻게 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에서처럼 신앙생활에서의 부자는 가난한 자와 비교될 때 부정적으로 이해되어지기에 확인하려는 질문일 것이다.

▨… 보프에 의하면, 성 프란체스코가 택한 자발적 가난은 풍요로운 영적 보상을 가져다주지만, 비자발적 가난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짓누르고 질식시키고 있다. 따라서 자발적 가난은 축복이지만 비자발적 가난은 사람이 만든 저주다. 자발적 가난의 목적은 비자발적 가난의 비참함을 없애려는 것이다.(하비 콕스, 「예수 하버드에 오다」) 여기서 이 시대의 목회자들의 가난이 자발적인 것인지, 비자발적인 것인지를 묻는다면 너무 잔인한 것일까.

▨… 목회자가 다른 직업을 이중으로 가진다고 해서 가난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애초부터 목사의 이중직은 가난을 벗기 위한 것이 아니다. 월세 때문에 교회를 지킬수 없는, 예배처소를 지켜낼 방법이 없는 자신의 상황을 깨뜨리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뉘라서 이중직을 즐겨하겠는가. 막다른 지점에서 이중직을 결단하는 젊은 목사들에게 자발적 가난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은 가난을 강요하지 말자. 가난이 젊은 교회 개척자들을 질식시키는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