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균 교수
     (서울신대)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내가 원치 않는 웅덩이와 수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시편 40편을 보니, 시편 기자는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간절한 기다림을 의미합니다. 같은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한 것은 강조의 용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응답이 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내’입니다.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이지만,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가 기다림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웅덩이와 수렁에서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다림’이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라는 상징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자기 포기’, ‘내려놓음’, ‘죽음’ 등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내려놓고, 포기하지 않고는 온전히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렇게 보자면 믿음이 없이 무작정 기다리는 일은 무의미할 수 있고,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에서 종종 실패할 때가 언제입니까?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할 때입니다. 기다림을 포기하면 그 순간 불신앙의 모습이 나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다가 더 꼬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기다리기를 포기할까요? 조급함 때문입니다. 빨리 끝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냥 기다리면 됩니까? 아닙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은 신앙적인 기다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편 기자는 “부르짖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Cry Out’입니다. 울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명한 대상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그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할 수 있기에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기다릴 때, 어떠한 변화가 있습니까? 외적인 변화, 상황적인 변화, 그리고 세상의 변화는 금방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내면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울부짖을 때, 그분이 살아계시기에, 안타깝게 부르짖는 나의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그리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것이 내면의 변화입니다. 여러분! 한번 세상의 일상과 잠시 단절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분명히 내면에서 평안과 기쁨과 소망의 기운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부터 변화를 경험케 하시며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동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지만, 소망을 가질 수 없다면 그것은 울부짖는 기도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없는 삶은 기다림이 없는 삶입니다.

시편 기자는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하나님께서 구해주셨다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기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우리를 끌어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끌어내셨으며, 요셉을 형들의 웅덩이에서 끌어내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와 무덤에서 끌어내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끝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반석은 요동하지 않는 곳입니다. 견고한 장소입니다. 즉, 다시 미끄러져서 웅덩이와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새 노래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일입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3절)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냅니다. 새 노래는 한 번도 불러보지 않은 노래를 말하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된 노래도 새로운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노래인데, 하나님의 깊이 있는 은혜를 경험하고 나서 부르는 노래는 새로운 노래가 됩니다.

이제 걱정과 불평과 원망이 있었던 내 입술에 새 노래가 생겨났습니다. 그 노래만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새 노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여야 나올 수 있는 노래가 새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다같이 팬데믹의 어려운 시대에서 새 노래를 찬양하며 나가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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