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 고마워요. 남편의 병상 밑에서 잠을 청하며 사랑의 낮은 자리를 깨우쳐주신 하느님 이제는 저이를 다시는 아프게 하지 마시어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죄로 한 번의 고통이 더 남아 있다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것이라면 이제는 제가 병상에 누울게요. 하느님, (중략)/한 여자 남편으로 토방처럼 배고프게 살아왔고, 두 아이 아빠로서 우는 모습 숨기는 능력밖에 없었던 남자지요. 공주 금강의 아름다운 물결과 금학동 뒷산의 푸른 그늘만이 재산인 사람이에요.(하략)”

▨… 우리 성결교단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지만 지방회 대의원마저 한사코 사양하다 은퇴한 어느 장로님께서 나태주 시인의 부인이 쓴 시를 보내주셨다. 아마도 나태주 시인은 알아도 그 부인에 대한 귀동냥은 없을 것이라고 짐작하여 보내주셨는지 아니면, 교회가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는데도 이런저런 비판에만 눈길이 쏠려있는 애오개가 조금은 못마땅하다고 슬쩍 귀띔해줄 요량이셨는지는 물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노(老)시인 나태주의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하느님”이라는 아내를 위한 하소연과 “너무 고마워요”라는 나태주 시인의 아내가 쓴 화답시를 함께 보내준 마음에는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귀띔이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요마는, 이만한 기도를 물리치시기는 아무래도 어려우시리라”는 보통 신앙인들의 믿음의 세계를 애오개가 무관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으로서의 귀띔이었다.

▨… 많이 아팠다. 귀띔이 송곳이 되어 가슴을 찔렀다. “이토록 순박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우리 곁에 있는데” 우리의 눈은 그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어졌음을 확인하는데 그럼에도 애오개는 곁길로 빠진 신앙만 뒤쫒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교회 안에는 보통 사람들의 사랑이 마그마(magma)처럼 들끓고 있음에도 언제인가부터 교회는 그 사실을 증언하기 보다 교회갱신 사회개혁의 기치만 높이 들려했던 것은 아닐까.

▨… 사도 바울은 “사랑이 제일”(고전 13:13)이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믿음의 내용이 사랑이며 믿음의 실천도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교회를 교회되게 한다는 사실을 코로나19의 시대가 바울과 함께 확인한다. 애오개도 또한 함께 확인한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자의 결단”(키르케고르)이 이루어내는 것임을 애오개는 고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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